ADVERTISEMENT

「절대」의 토양선 민주의 꽃 안 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국회개헌특위의 구성으로 합의개헌을 향한 제1보가 내디뎌 졌다. 헌특 자체를 반대하는 세력도 없진 않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 기구에 보다 민주적인 헌법 마련에의 소망을 걸고있다.
우리 헌정사에서 거듭돼온 정당성의 논란과 단절되기 위해서도 여야합의개헌은 기필코 이뤄져야 한다. 더구나 현재의 국회의석 분포상으로도 매수니, 변절이니 하는 뒷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합의개헌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합의개헌을 이룩해 내기만 하면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크게 신장될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인 사정만 놓고 보면 지금은 우리 헌정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합의개헌의 여건이 좋은 편이다.
지금까지 여덟 차례의 개헌 중 여섯 번은 당시 집권자가 쿠데타 이후의 합법적 집권이나 집권연장을 위해 주도한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퇴진을 전제로 한 이번 개헌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담에서 해방되어 있다. 어느 때보다도 여야 정치인들에게 신축성과 운신의 여지가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과연 국회개헌특위가 합의개헌을 이룩해 낼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집권자의 집권연장부담에선 물렸지만 차기집권을 노리는 특정인 또는 특정세력의 집권편의를 위한 특정제도 선호가 또 새로운 부담거리가 되고있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정당의 집권대망은 자연스런 것으로 탓할 일이 못 된다. 그러나 그러한 대망을 위한 방편이 민주주의란 명분으로 포장돼 특정제도만이 민주주의이고 다른 제도는 민주반역인 것처럼 주장되는 풍토가 되어선 곤란하다.
그러한 절대의 토양에서 민주의 꽃은 피지 못한다.
민주정치는 상대주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나는 절대 옳고 너는 절대 그르니 내 주장을 기필코 관철하겠다고 할 때 거기에선 이미 민주정치가 설 땅은 사라지고 만다.
개헌문제에 대해 현재 야당은 대통령제만이 민주화고 직선제만이 살길이라고 내세우는 반면, 집권당은 직선제를 하면 당장 나라가 반목이라도 나는 듯 호들갑이다.
국회개헌특위를 만들긴 했어도 야당 측이 협상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 당론을 수정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직선제반대 이외에 구체적 당론을 내놓지 않은 집권당도 지금의 반대기세로 보아 대통령 직선제도 괜찮다고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화하고 타협해야할 양대 세력의 이러한 입장의 경직성이야말로 합의개헌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다.
이러한 장애를 정치가 해소하지 못해 합의개헌에 실패한다는 것은 가상만으로도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 경우 집권세력은 현행헌법을 그대로 밀고 나가든지, 제1야당을 제외한 개헌을 시도하든지 해야할 처지로 몰리게 된다.
이미 야당의 개헌주장을 수용해 현행 헌법의 문제점이 드러날 대로 드러난 마당에 다시 호헌으로 돌아선다면 범야세력은 거센 항거를 하게될 것이다.
대통령선거 보이코트는 고사하고 당장 가두에 수많은 군중을 동원하는 필리핀식 투쟁노선으로 나서려 할게 뻔하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집권세력 또한 호락호락 물러설 리 만무하다.
한 미국정치인의 걱정대로 같은 궤도를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코스로 내닫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지 않더라도 현 국회든, 조기총선거를 거친 새 국회에서든 일방적인 개헌을 하자면 불가불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라 해묵은 체제의 정통성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헌정사를 되돌아보면 이 비슷한 어느 경우에도 우리의 민주정치는 발전이 아닌 후퇴의 길을 걸었다. 어쩌면 또 한차례 급격한 후퇴가 엄습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합의개헌의 실패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민주개헌을 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살리지 못해 정치가 후퇴한다면 이 시절의 정치인들이 정치인으로서 설 땀인들 유지되겠는가.
이런 불안과 불 확실을 피하고 현재의 경색을 푸는 유일한 돌파구는 합의개헌뿐이다. 여야 모두의 기대폭발을 스스로 억제하고 보세대화를 강화하는 한편 합의개헌의 저해요소를 제거해 나가야겠다.
현행 헌법의 가장 큰 문제점이 대통령 선출과정에서 국민의사를 공정하게 반영치 못한데 있는 만큼 이번 개헌은 그러한 공정성의 회복에 중점을 둬야한다. 따라서 공정성만 보장된다면 합의개헌이 저해될 정도로 어느 한 제도에 집착하는 건 현명치 못하다.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직선제든 국회간선제든 민주적이고 공정한 제도이기만 하다면 선입견 없는 개방자세로 우리토양에 적합한가를 면밀히 따져볼 일이다.
그러자면 자유스런 개헌논의가 전제돼야한다. 합의개헌의 전제가 되는 자유로운 개헌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 선호를 반정부로 불온시하거나, 의원내각제와 간선제에 대한 관심을 해바라기성으로 어용시하여 언로를 막는 일부 반지성적 흑백풍조 또한 사라져야 할 것이다.<성병욱(편집부 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