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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높이 날아 멀리 보는 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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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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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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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석 주 말레이시아 대사는 지난 5월 신임장을 제정하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압둘 하림 국왕이 신임 대사 9명을 접견하는데 전체 20분 가운데 16분을 유 대사에게 할애했기 때문이다. 하미나 왕비가 한국의 여자 골퍼들 이름까지 거명하며 흥미를 보였다. 다른 대사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눠야 했다.

K팝, 드라마, 한류의 성공이
화장품, 외교에 힘 실어줘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만
일부 부자들 일탈 아쉬워
기초과학 없이 멀리 못 가
가진 것 지키는 최선은 기부

말레이시아 국왕은 13개 주에서 9명의 술탄이 5년씩 돌아가며 맡는다. 지난해에는 이스칸다르 전 국왕이 한국의 걸그룹 티아라를 궁전 점심에 초청했다. 말레이시아뿐이 아니다. 아베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의 한류(韓流) 사랑은 잘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다가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한국의 중학교를 방문해 한국 교과서에 실린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며칠 전 아시아정당회의(ICAPP) 미디어포럼 참석차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도 여러 가지 즐거운 경험을 했다. 말레이시아 집권당 지도자의 한 여성 보좌관은 한국 대표단에 특히 친절했다. 그녀는 한류 팬이다. 정의용 ICAPP 사무총장을 ‘할아버지’, 다른 한국 사람은 ‘오빠’라고 불렀다. 한국말을 하는 식당 직원도 만났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배운 실력이라고 했다. 최대 쇼핑몰 KL파빌리온에는 아리랑을 시작으로 한국 음악들이 흥겹게 편곡돼 흐르고 있었다. 동남아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드라마가 드라마로 끝나지 않고, K팝이 K팝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교, 기업 활동에 도움을 주고, 다시 도움을 받는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박세리 이후 여자 골퍼들의 세계 무대 장악도 알게 모르게 세계 지도층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바로 이 말레이시아에 아모레퍼시픽이 새로 해외 생산기지를 건설한다. 프랑스 사르트르, 중국 상하이에 이어 세 번째다. 돼지기름 등 금기사항이 많은 이슬람권에서는 화장품도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아모레퍼시픽의 성공은 서경배 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 덕분이다. 그렇지만 한류 바람을 타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드라마, K팝의 인기로 한국 탤런트와 아이돌이 미의 상징이 됐고, 한국산 화장품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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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회장은 “성공은 자신이 노력하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도움에는 한류도 포함됐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류와 함께 한국 화장품 기업들이 크게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공 이후의 행태는 너무나 다르다. 자신이 이룬 성공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는 정말 입지전적인 사람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시장에서 노점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대리점을 하고, ‘식물원’ ‘더페이스샵’이란 상표로 큰돈을 모았다. 정 대표는 대기업에 더페이스샵을 수천억원에 매각하고, 다시 세운 네이처리퍼블릭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큰 성공 이후에 그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흔히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인 도박에 빠졌다. 그는 2012년 마카오에서 300억원대의 도박을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전관 변호사를 고용해 무혐의로 풀려났다. 법이 우습게 보일 만했다.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해외 원정도박을 벌였다. 이번에도 돈이면 해결된다고 생각했을까. 100억원대 수임료와 뇌물을 뿌리고 성공보수를 돌려달라, 안 된다 승강이하다 법조게이트로 비화했다.

그런 참담한 마음의 끝이라 서경배 회장의 사재(私財) 출연이 더욱 반갑다. 그는 3000억원으로 ‘서경배 과학재단’을 만들었다. 개인 재산으로 만든 첫 기초과학재단이다. 그는 “많은 분의 관심과 도움,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반드시 크게 돌려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구상을 들어보면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모레는 이미 해마다 수천억원을 들여 3년짜리, 5년짜리 연구를 하고 있지만 새 재단은 “30년씩 걸리는 연구를 지원해 세상을 바꿀 무언가를 만들 것”이란 것이다. “높이 날아서 멀리 보는 새와 빨리 나는 새가 모두 있어야 거대한 기러기 편대가 만들어진다”는 말도 적절하다.

선진국을 쳐다보면 늘 아쉬운 것이 기초가 약한 것이다. 노벨상이라는 메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갈 힘이 없다. 이제 중국이 덮쳐온다. 기초가 없이는 길이 안 보인다. ‘높이 날아 멀리 보는 새’가 없이는 생존이 어렵게 됐다. 과학뿐이 아니다. 돈을 벌고도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인문학이란 기초가 빈곤한 탓이다. “뜻을 같이하는 분이 더 많이 나와서 함께 만들어 갔으면 한다”는 서 회장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가진 사람이 자기 것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공존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