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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는 대중과 손잡고 엘리트 무력화시킬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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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22면

1 로물루스 황제가 오도아케르에게 황제의 관을 바치는 모습.

지금으로부터 꼭 1540년 전인 476년 9월 4일(율리우스력)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폐위됐다. 또 146년 전인 1870년 9월 4일에는 프랑스 제국의 마지막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폐위됐다. 고대 로마와 근대 프랑스는 선구적으로 도입한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정(帝政)을 채택한 나라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와 나폴레옹 3세의 폐위로 서로마와 프랑스의 제정은 종식됐다. 제정은 어떻게 등장하고 소멸할까?


먼저 제정의 출범은 엘리트보다 대중에 힘입는다. 고대 로마와 근대 프랑스가 제정을 도입할 당시 엘리트 계급은 이에 저항했다. 로마의 경우, 공화파와 반(反)공화파는 내전을 겪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초대 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근대 프랑스에서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감행했고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제1공화정을 붕괴시켜 제1제정의 황제(나폴레옹 1세)로 즉위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프랑스 제2공화정의 대통령일 때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을 붕괴한 뒤 국민투표로 제2제정 황제(나폴레옹 3세)에 즉위했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로 즉위할 때에는 모두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통해서였다. 즉 공화정이 엘리트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될 때 대중은 제정의 도입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다.


 

2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는모습. 요셉-노엘 실베스트르. 1890. [위키피디아]

서로마제국, 황제직 찬탈 반복하다 멸망나폴레옹 3세는 젊었을 때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파업권 인정은 그의 치세 때 나왔다. 물론 제한적인 파업권이었고 또 그가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정치 엘리트보다 대중에게서 인기를 얻으려 노력했음은 분명하다. 나폴레옹 3세는 정치 엘리트와 거리를 두고 대신 비(非)정치 엘리트를 중용해 산업과 도시의 개발에 집중했다. 이처럼 제정 초기에는 공화정과 달리 황제가 대중과의 연대를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제정의 폐지에서는 대중 뿐 아니라 외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제정이 대중의 지지에서 멀어지면 경쟁 세력의 권력 장악 시도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경쟁 세력은 내부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올 수 있다. 제정의 붕괴는 주로 외부 세력의 무력에 의해서다. 물론 1인자가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고 또 외부 적에게 완패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외부 위협은 오히려 내부 질서 장악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국기 집결(rally round the flag) 효과가 그런 예다. 이와 달리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이미 상실했거나 또는 외부 세력에게 치명적인 패전을 당한 상황이라면, 1인자의 정치 생명은 종말을 맞게 돼 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종종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로 불린다. 전설상의 로마 건국자인 로물루스 그리고 ‘소년황제(어린 아우구스투스)’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툴루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명칭이다. 475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오레스테스는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가 도망가자 15세의 아들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다. 이듬해 8월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오레스테스를 살해하고 9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재위 10개월 만에 퇴위시켰다.


오도아케르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로 자처하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넘기고 제논의 위임으로 이탈리아 왕이 됐다. 네포스 또한 폐위를 당한 후에도 자신의 본거지인 달마치아(지금의 크로아티아)로 가서 스스로 서로마 황제로 처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 서로마 황제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네포스 또는 오도아케르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킨 후 서로마 제국의 여러 왕국에게서 명목상의 황제직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이와 달리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당시 서로마 황제의 휘장을 정식으로 사용했고 또 그의 황제 휘장은 오도아케르가 반란 후 동로마 제국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보는 게 적절하다. 마지막 황제가 누구냐에 대해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이나 서로마제국 말기에는 허울 뿐인 황제였다. 황제직 찬탈이 반복되다가 결국 제국이 사라진 것이다.

1870년 스당 전투에서 항복한 나폴레옹 3세가 빌헬름 1세에게 칼을 바치고 있고 이를 비스마르크(흰 제복)가 지켜보고 있다. 석판화.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3세, 보불전쟁 패배로 퇴위근대 프랑스 제정의 멸망은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서였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에 분개해 프로이센에게 먼저 전쟁을 선포했다. 그런데 황제가 직접 나선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포화를 견디지 못해 항복했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스당 전투 패전 후 프랑스는 제정을 폐지하고 전쟁을 계속했지만 파리의 함락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프랑스는 공화정을 채택해 현재 150년 가까운 공화정 역사를 갖고 있다.


제정의 출범에는 내부의 힘이, 제정 붕괴에는 외부의 힘이 각각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프랑스 제1공화정이나 제2공화정의 종식은 각각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내부의 권력자가 이끈 것이라면, 제1제정과 제2제정의 붕괴는 반(反)프랑스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이라는 외부 적에게 각각 패전함으로써 이뤄졌다.


제정과 공화정은 권력의 분배에서 어떻게 다를까? 제정이나 왕정은 지배자의 세습을 기본으로 하고 공화정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으나, 역성혁명뿐 아니라 같은 왕조에서도 세습에서 벗어난 왕위 계승은 종종 일어났다. 지배자가 세습되느냐 아니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지배자가 1인이냐 아니면 집단이냐는 것이다.


권력 서열을 크게 1인자·엘리트·대중의 3가지로 구분해보자. 고대 로마에서 공화정이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였다면, 제정은 1인자와 엘리트 간의 경계를 높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프랑스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도입될 때에는 1인자·엘리트·대중 사이의 2가지 경계가 모두 무너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중은 1인자-엘리트 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엘리트-대중 간의 경계가 오히려 더 강화된다고 느꼈고, 따라서 대중과 연대한 1인자를 내세우면 엘리트-대중 간 경계를 낮출 수 있다고 기대했다. 즉 1인자-엘리트 간 구분을 전제로 하는 제정을 지지한 것이다. 고대 로마와 근대 프랑스 모두 소수 엘리트가 지지한 공화정은 다수 대중이 지지한 제정에 의해 대체됐다. 그러다가 제정 말기에는 1인자가 대중을 챙겨주지 못해 1인자-대중의 연대가 약화되었고 제정은 외부 세력의 공격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 정권이 출범할 때에는 소수에게 많이 뺏어서 다수에게 조금씩 나누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1인자-대중의 연대다. 시간이 흘러 정권 유지 시기에는 다수에게 조금씩 뺏어서 소수에게 많이 나누는 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무력이나 여론을 장악한 소규모의 지배집단에게만 혜택을 주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이는 1인자-엘리트의 연대다.


 1인자-엘리트 유착하면 대중이 응징이에 비해 민주국가에서는 소규모 지배집단만 챙긴다고 해서 정권을 교체하거나 연장하는 게 쉽지 않고 또한 엘리트와 대중 간의 혜택 격차를 크게 유지할 수 없다. 1인자를 지향하는 지도자든 정권을 쟁취하려는 정파든, 자신이 더 많은 대중을 대표하려는 경쟁으로 정권 쟁취를 도모한다. 다만 제도 변경의 게임에서 대중성이 있는 정치인을 확보한 측에서는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그렇지 않은 측에서는 의원내각제를 주장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자신을 잘 대표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인지 아니면 지역구 국회의원인지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은 헌법과 국호에 공화정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 앞에 종종 ‘제왕(帝王)적’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왕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 용어를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한 아서 슐레징거가 언급한 미국 대통령제에 비하면 한국 대통령제는 헌법조문과 정치문화의 측면 모두에서 대통령 1인에 권력이 매우 집중되어 있는 제왕적 대통령제다. 단임제라는 점 말고는 매우 제왕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통령제를 공화정보다는 제정에 가까운 권력구조로 보고, 대통령제 대 의원내각제 논의를 제정 대 공화정 논의로 전개하기도 한다.


종종 1인자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 엘리트를 혐오하기도 한다. 1인자는 엘리트보다 대중과의 연대를 중시하고 대중에 의존하려 하며 이를 통해 엘리트의 부적절한 관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1인자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구조로의 개헌에는 모두 대중의 동원 또는 동조가 있었다. 이와 달리 엘리트와 대중,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으려는 1인자는 정치적 경쟁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민심(대중의 지지)에서 멀어지면 권력의 기반 자체를 잃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에는 오늘날 세계에서 찾기 힘든 독보적인 1인 지배 체제가 있다. 바로 북한이다. 만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인민을 챙기지 못해 내부 민심의 이반에다 외부 세력의 압력까지 더해진다면, 1인 지배 체제의 종식은 불가피하다. 체제 유지를 위해 민심을 다급하게 헤아려야 할 쪽은 1인 지배자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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