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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씨와 봉산탈춤|신들린 탈춤 25년…민속극 대중화 앞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일 상오11시 서울 강남선릉옆 중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뒷마당-.
김기수봉산탈층보존회 이사장(50)이 20여명의 주부 강습생들을 데리고 심현육각을 생략한 피리와 장구 반주에 맞추어 봉산탈춤의 기본 동작을 강습하고 있다.
한삼(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하는 봉산탈춤의 기본 동작인 깨끼춤을 추는 강습생들의 이마엔 금새 구슬땀이 흘렀다.
어느 탈춤보다도 활발하고 격렬하기조차한 봉산탈춤의 기본 동작은 가히 「한국형 에어로빅댄스」 임에 손색이 없다.
의상은 강습이기 때문에 김이사장만 묵중 옷을 갖추었고 강습생들은 말뚝이·취발이·소무등의 상의만을 입었다.
탈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 봉산탈춤은 70년대 후반이후 한국 전통 민속극의 간판 스타로 부상, 국내외 전통예술 공연때는 꼭 포함되는 레퍼터리다.
또 대학가 축제에서도 빠질수 없는 단골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봉산탈춤의 보급은 이제 단순한 전승보존을 위한 전문적인 전수 복수의 단계를 넘어섰다. 이 춤은 이제 주부와 학생들 사이에 에어로빅 댄스를 겸한 건전한 레저활동 또는 전통예술을 익히는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다.
탈춤의 대학가 선풍은 71년 김이사장이 서울대 민속 가면극회를 지도하면서부터 일기 시작했다. 봉산탈춤의 일반 보급을 위해 쏟아온 그의 정열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김이사장은 60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갖지 않은채 봉산달춤에 투신, 25년동안 봉산탈춤 강습 지도와 전통가면극 연구의 권위자인 이사현교수(서울대)의 탈춤조사를 돕는데 전념해 왔다.
이교수의 봉산탈춤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65년)를 비롯, 강익탈춤 송파산대놀이 마산오광대 은율탈춤조사(69∼76년)에 참여했다.
한국가면극연구회창립(58년)주역들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탈춤보급활동은 10여년동안 봉산탈춤을 배우고난 70년대초부터 본격화했다. 충남홍성이 고향인 그는 고교와 대학을 대전에서 다니고 60년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 봉산탈춤의 노중 목중 최발이역을 배웠다.
그의 노력으로 이제는 지방 전문대학에까지 「민속가면극회」 학생 서클이 모두 조직돼 있을 정도다.
그는 83년 봉산탈춤 이사장직을 맡으면서부터 한동안 중단됐던 일반 대상의 봉산탈춤 강습회를 년중 무료 동계 하계 6개월코스로 본격화했다.
60년초 서울 남산 드라머센터에서 시작, 석관동전수회관으르 이어지면서 계속된 일반 강습회는 70년대초 대학가 탈춤이 유행하면서부터 10여년동안 중단됐었다. 현재까지 봉산탈춤 일반강습을 받은 사람은 1천4백여명.
강습생은 대체로 학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84년부터는 주부들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탈춤이 대학가및 일반보급에서 열풍을 일으킨 데는 탈춤 특유의 풍자적 성격이 학생들의 구미에 맞았다는 점과 활달한 춤동작이 스트레스 해소나 레저적 운동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단오와 10월 상달에 년2회씌 정기발표 공연을 가져온 봉산탈춤보존회는 이번11일 단오절공연 (하오7시 서울놀이마당)으로 총36회의 정기공연을 기록한다. 77년 미국아시아협회 초청으로 첫발을 내디딘 봉산탈춤의 해외나들이는 지난 4월 캐나다밴쿠버 엑스포86까지 10회의해외공연을 가졌다.
현재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가면극 종류의 전통민속연극은▲해서탈춤=봉산·강익·은률▲경기=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영남=통영 고성 마산오광대, 동래 수영야유하회별신굿탈놀이▲함경=북청사자놀음▲호남=진도다시래기▲기타=꼭둑각시놀음(남사당) 발탈등 모두 15종이다.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된 봉산탈춤은 양반과 승려의 타락 비리를 풍자한 연극으로 봉산 사리원지방에서 농민과 장터 상인들을 대상으로해 연희한 놀이였다.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 1년에 한번씩은 꼭 놀았던 봉산탈춤은 19세기말 사리원에서 하룻밤 묵는 중국 사신들의 접대용 연재를 하면서 유명해져 관청의 놀이로 전업화한 경기도 산대놀이와 함께 탈춤의 2대 주류를 이루어왔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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