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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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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공화국 정치운행을 그르친 근원의 하나는 정치자금이다. 정구영당의장은 빗나가고 있는 정치자금에 최소한의 도덕적 규범과 질서를 마련키위해 무던히 애썼다. 그는 이 문제로 박대통령과 여러차례 맞부닥쳤던 그 얘기.
65년 새해도 계속해 당의장을 맡아 일을 하는데 불쾌한 심정은 뭐라 말할수 없었어. 모든 중요한 일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되고 당이나 당무회의는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해가는거야. 무엇보다도 경제시책이 정치자금과 결부되어 처리되고 있는 흔적이 자꾸만 눈에 띄어. 한일회담이 마무리 단계로 가니 청구권이다, 보관이다, 교포재산 반입이다해서 외국자본이 도입되고 수출 증산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융자가 나가게 되니까 특혜라는게 문제가 되고 그 그늘에서 정치자금이 복잡하고 미묘한 분쟁거리가 되는거야.
나는 필요한 산업을 일으키기위해 차관도 하고, 융자도 하고, 교포재산 반입도 하는것, 그것을 반대한건 아니야. 문제는 그런 일들이 특정인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는 특혜라는 말이 만들어지는 방향으로 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당시 우리나라 자본가 중에는 6·25동란중에 일종의 부조리로 축재한 사람들이 많았어. 개중에는 부산 피난가서 밀수하고 전쟁경기를 타고 불법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들도 있어. 그게 누구라는건 모두가 알던 때야. 차관이나 융자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어. 그래 소위 특혜라는 말이 나올때 나는 백남억정책위의장하고 김용택군한테 정제문제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알아서 연구해달라고 특별히 당부를 했어. 김용택군은 제3공화국 초대 기획원장관을 맡았다가 나와서 그때 공화당 당무위원으로 있었어. 그래 김군한테는특히 항간에서 말들이 많은 특혜문제에 대해 조사 검토를 시켰어. 그랬는데 내가 조사를 지시했다는 말이 청와대에 알려졌던 모양이야.
그때는 거의 매일같이 대통령과 만날때인데 하루는 대통령이 나를 보고 특혜문제 얘기를 불쑥 꺼내.
-당에서 너무 특혜문제에 간여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의 정책위원회는 그럼 뭣하는 것입니까.
-당에서 어느 기업에 융자를 얼마를 주고, 어느 기업에 대해서 지불보증은 어떻게 하고 그런것을 당이 검토하고 결정하러 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말씀은 옳습니다 .당은 구체적인 행정문제는 간여치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얼마주고, 누구한테 차관을 허용해 주는 문제는 당은 간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경제정책이나 그 운용이 공화당의 정강정책에 위배되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나라의 경제정책을 다루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원칙문제만을 파고 들어가지 구체적인 행정사무는 당의 정잭위원회가 파고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건 않는데 당정책위원회더러 경제정책의 중요부문을 심의하지 말라는 말씀은 알아 들을 수가 없읍니다.
-그런 말은 아니고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특혜라고 하니하는 말입니다. 특혜가 있다해도그 조사를 당이 하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제운용이 잘못되어 특혜라는 말을 듣게되면 그것은 당의기본정책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부정부패 일소는 당의 기본공약인데 .그렇지만 그런 문제는 당으로서도 신중히 다루어 나갈 것입니다.
세세한 얘기는 내가 여기서 할바 못되지만 청와대에 정의장이 들어오면 재떨이가 왔다갔다 했다는 말이 나온게 그때야. 말이 과장되어 재떨이를 던지는 것으로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건 아니고 대통령이 연신 담배를 피우고 일어서서 왔다갔다 하니까 재떨이가 대통령 따라 왔다갔다 했다는 얘기지. 그때는 그 문제로 퍽도 논쟁을 많이 했었어. 청와대에서는 공화당에서 특혜문제에 대해 쓸데없이 이면에서 이러쿵저러쿵 조사를 하고 간섭을 하려한다고 반발이고, 그렇다고 당에서 그런 일을 눈감아 버리면 정책적으로 과오가 되고, 그런 모순속에서 고민을 했었지.
정씨의 회고의 말 그대로 그때 특혜는 시끄러운 정치문제였다. 산업의 황무지, 인플레등 그때의 경제환경에선 차관이건, 융자건 그 자체가 엄밀하게는 모두 특혜였다. 문제는 우선순위고 선택의 기준 그런것들 이었다. 경제운용의 공정성을 재단하는 눈은 저마다 달랐다. 모두가 차관과 융자라는 특혜를 좇아 뜀박질이고 저마다 나름의 줄을 대고 그 줄들이 충돌했다.
그런 충돌이 국회에서 정치문제로 표면화되곤 했다. 야당은 말할것도 없고 여당인 공화당까지도 정부와 특정기업의 유착을 문제삼았다. 1월초엔 9개업체에 대한 편중대출이 말썽거리가 되었다. 다급해진 경제기획원은 대통령과 전각료를 상대로 말썽많은 경제운용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문제의 9개업체에 대한 대출은 1백70억원으로 전금융기관 대출의 22%에 해당되지만 거기엔 차관의 지급보증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대출총액이 4백억원쯤 된다면 혹 특혜라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정도는 특혜가 아닙니다. 수출진흥을 위해서는 당연한 시책입니다』 라는것이 이날 2시간의 긴 설명끝에 내린 기획원당국의 결론이었다. 대통령도 기획원의 설명에 흡족해 하면서 과감한 시책을 당부했다고 했다.
당과 정부 사이에서 뿐 아니라 당내에서도 이해가 충돌해 파벌대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듯 했다. 2월중순께엔 주류파 참모장이던 김용태와 비주류파의 실력자 김성곤이 공개적으로 대결했다. 김용태의원은『특혜융자의 회수는 당의 방침입니다. 정구영 당의장도 국회 기조 연설에서 이같은 당의 기본방침을 밝힌바 있읍니다. 백억원대규모 이상의 대출은 회수해야 합니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금성방직의 사주이기도 한 김성곤재경위원장은 『누가 특혜용자 회수를 반대한다고 했나. 국책에 따라 시멘트 공장하나 건설하는걸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데 되지도 않을 사업에 수십억원씩 대출해간건 누군데 .나는 뭐 할말이 없는 줄 아나』라고 반격했다.
정부와 업계의 유착을 감독하고 견제해야 할 국회재정위원회가 김성곤재경위원장의 조종아래 낮잠이나 잔다해서 의원들이 불평했다. 도대체 화신·판본·삼호의 편중 대출은 왜 재경위원회에서 어물어물 넘기고 그래. 국회상임위원회 임기를 2년으로 할게 아니고 1년으로 줄이는 법안을 내야겠다고들했다.
국회와 각 정파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자 교포재벌인 판본까지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일본서 번 돈을 고국에 가져와 봉사하겠다는 건데 겨우 몇억원 융자받는걸 갖고 이토록 매질한다면 들여온 재산을 몽땅 거둬서 일본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대통령에게 직소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3월엔 특혜의 한가닥이 정치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경지대출이다. 편파대출의 의혹을 더한 것은 이후락의 제주발언이다. 그는 화신·판본·삼?에 대한 거액융자는 시중은행장이 독단으로 한것이지만 그것은 민족자본형성을 위해 부득이한 것인데 야당이 이를 특혜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발언이 사태를 도리어 악화시켰다. 야당은 이후락의 발언은 세기업에 대한 불법대출이 청와대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혐의를 짙게한다고 성명했다. 아니나다를까 국회재경위에서 야당은 그내막을 폭로했다. 2월11일 청와대에서 경제각료 금융기관장 연석회의를 열어 세기업에 대한 거액대출을 결정했다.
그리고 2월13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통위원들이 기업의 미불금을 은행이 대불해주는등의 편파대츨은 한은법 7조에 위배된다고 난색을 표시하자 김봉균재무차관은 청와대에서 결정한 최고정책이니 딴소리는 말라. 법적인 문제는 추후 적절한 보완조치를 하겠다고 해 승인을 받아냈다고 했다는 것이 그 내용. 결국 정구영당의장이 염려해온 대로 정치자금을 둘러싼 의혹이 권력의 중심에 비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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