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협상…사심 없는 타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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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송진혁<정치부장>]
이제 개헌 협상테이블은 마련되는 것 같다. 3, 4일 두 차례 청와대 고위회담이 있은 후 이어 5일 국회가 열려 헌법특위가 구성되고 이른바 합의개헌을 위한 대 협상의 막은 오르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작년 2·12선거 후 이 협상의 장을 마련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을 돌아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가.
여권은 당초 개헌요구를 상대도 않다가 89 개헌론이 나온 2·24 청와대 회동이 있기까지 1년 가까운 호헌 강조기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89 개헌론은 89 개헌가능론으로 변형되고 4·30 청와대 회동에 가서야 임기 내 개헌을 정립한 것이다.
그 동안 여권이 호헌론을 위해 애쓴 물심의 노력이 얼마나 됐을까를 생각한다면 한심한 느낌이 안들 수 없다.
여권 요인들이 말끝마다 전개한 호헌론의 논리 마련에 얼마나 부심 했겠으며, 여당의 각급 조직에서 호헌 연수·호헌 단합대회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89 개헌의 용단」을 실현한다고 하여 적잖게 품을 들인 게 사실이고 이것을 89개헌 가능론으로 전환시키는데도 꽤 애를 썼던 것이다.
여권이 이런 과정을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명을 하고 시국선언을 했으며, 또 조사받고 연행되고 구속되고 기소되고 했던 가도 되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사이 쓰인 최루탄과 동원된 전경의 고초도 작다고는 못할 것이다.
여권이 이처럼 굽이굽이 돌고 돌아 협상의 장에 이른 것과는 달리 야당은 비교적 직선코스로 달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작년 총선 직후부터 일관되게 개헌을 주장하고, 특위명칭에는 「개정」두자가 들어가야 하며, 시기는 임기 내 또는 연내가 돼야 한다고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게 사실이다. 또 이런 주장은 이제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협상테이블에 오기까지는 비록 기간은 짧았다고 할지는 모르나 야당 역시 적잖은 좌고우면과 대가를 치렀다고 봐야한다.
4·30 청와대 회동에서 대망의 임기 내 개헌론이 나왔는데도 야당은 개헌결성대회라는 장외 개헌압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사태를 겪었고 살얼음판을 걷듯 마산대회를 넘겼으며, 지난달 31일에는 전주대회까지 강행했다.
이런 대회가 대회로만 끝난 게 아니라 수십 명·수백 명의 연행·구속·기소가 따랐고 그것은 여권뿐 아니라 야당의 정치적 짐도 되고있는 것이다. 자기집 잔치손님이 귀로에 변을 당하면 주인 심정도 불안한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야당으로서는 그 과정에서 개헌추진의 동반자였던 재야 및 운동권과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당내 불협화와 야권 보조 불일치로 연결되면서 정국불안의 큰 요인이 되고있는 것이다.
신민당의 장내복귀도 실은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뤄지는 셈이다.
이처럼 지난 1년여의 과정을 생각하면 오늘날 대 타협이 고창 되고 여야가 다투어 합의개헌을 다짐하는 현실은 자못 깊은 감회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렵고 험한 길을 거쳐 이제 협상테이블까지는 왔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직 협상테이블에 이른 것일 뿐 협상자체가 타결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있을 개헌안 내용의 협상이 또 얼마나 기구할지는 측량하기 어렵고, 아예 미리부터 각오를 하고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개헌협상은 곧 88년 이후의 정권협상이란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전도 험난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 협상이 성공하면 합의 개헌·평화적 정권교체·민주화 진전이란 순 코스가 열릴 수 있고, 실패하면 정국과 시국은 다시 안개 속을 헤매다가 어디까지 갈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느 길을 가느냐의 열쇠는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자, 제 세력들이 쥐고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이 평소 말끝마다 강조해온 대로 점잖고 애국·우국의 충정으로, 또는 대화와 타협·공존의 정신으로 협상에 임한다면 협상이 성공 못할 이유가 없다. 반면 이들 중 누구라도 개헌안 내용을 자기의 집권이나 득세와 연결시켜 고집하고 수를 쓰고 중론을 외면한다면 협상은 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야 지도자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평소 말해온 것을 이제부터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일찌기 김대중·김영삼씨는 80년의 분열을 반성하고 사심 없는 민주화 헌신을 다짐했으며, 김영삼씨는 『욕심이 없다. 대통령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버렸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이민우 총재 역시 『나이 70에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민주화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도 취임 초부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강조했고 작년 정기국회 대표연설에서는 정치대결의 완화를 역설하면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공동 운명자」의 입장에서 화합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여야 지도자들의 이런 말들을 믿고싶다. 조국의 운명에 중요한길목이 되고있는 이 개헌협상에서 그들의 말을 이제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자 한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이 4·30 청와대 회담에서 말한 대로 「통일이 될 때까지 갈 수 있는 만족한 내용의 헌법」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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