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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해저선을 보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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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9면

그해 최영 장군은 만 일곱 살, 코흘리개로 한창 뛰어놀았을 나이였다. 숙적이자 나중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는 12년 후에나 태어난다. 조정의 명신 이제현이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행정단위로 편입시키려는 간신들의 책동에 맞서 동분서주하던 바로 그해,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이었다. 제주도 남쪽 바다를 배 한 척이 항해하고 있었다. 길이 34m, 폭 11m에 무게 200t이 넘는, 당시로선 최첨단의 무역선. 배 바닥에 실린 중국·베트남 동전만 헤아려도 무려 800만 개, 28t에 달했다. 음력 6월 3일 마지막 짐을 싣고 중국 경원(현재의 닝보·寧波)항을 떠난 배는 목적지인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에 닿지 못하고 폭풍을 만나 한반도 남쪽 다도해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돛대가 부러져 옴싹달싹 못하는 데다 배 옆구리 깨진 곳으로 물이 들어와 끝내 침몰하고 만 지점이 바로 전남 신안군 증도 앞바다, 깊이 20m 바닷속이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9월4일까지) 전시회를 며칠 전 다녀왔다. 기획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녹색 그물로 감아놓은 ‘모란 넝쿨무늬 큰 꽃병’이었다. 693년 전 이맘 때쯤 바다에 가라앉은 무역선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1975년 8월 20일 신안군 어부 최형근씨(당시 40세)의 그물에 이 꽃병을 포함해 6점의 도자기가 걸려 올라왔다. 별 것 아닌 듯한데 버리기도 아까워 마루 밑에 두었던 보물은 동생 평호씨(당시 35세)가 이듬해 신안군청에 신고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198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진행된 수중발굴로 2만4000여 점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안해저선이 발견되기 전 송·원나라 시대 도자기가 국제 골동품 시장에서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리다가 발견 이후 경매가가 폭락했을 정도였다(서동인·김병근 『신안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우리는 왜 음악회나 연극, 전시회를 시간과 돈을 들여 다니는 것일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비일상(非日常) 내지 이질감을 즐기는 맛을 가장 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를 보면서 음률보다는 조그만 판자쪼가리에 얹은 줄 몇 개에 평생을 건 낯선 무모함에 더 감탄하는 편이다. 가끔 허섭스레기만 차 있는 듯 느껴지는 나의 일상에 찬물을 끼얹는 이질감을 소중하게 여긴다. 신안선 전시회에서는 중세의 어느 여름날 제주도 남쪽 바다 위에서 동아시아 상인·선원·화물주들이 보낸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간여행이 따로 없다. 중국인 요리사는 웍(wok)으로 요리를 하고 있었고, 일본 승려는 향을 피우고 바라와 징으로 공양을 올렸다. 고려 청자(7점 발굴)를 어루만지며 자랑을 연발하는 상인 옆에서 몇몇은 점심 내기 장기나 바둑을 두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게타(일본 나막신)와 짚풀 모자 유물 앞에서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오래 신었던 듯 게타는 앞부분이 꽤 닳아 있고 뙤약볕을 가려주던 짚풀 모자는 용케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700년 전 그들과 나 사이는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 나와 지금부터 700년 후 사람들은 얼마나 차이나는 것일까.


전시의 마지막 순서이자 백미(白眉)는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시가 쓰인 접시’였다. 청백자 바닥에는 한문으로 ‘흐르는 물은 어찌 저리도 급한고(流水何太急) /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深宮盡日閑)’라는 시가 적혀 있다. 당나라 말 우우(于祐)라는 선비와 궁녀 한(韓)씨의 로맨스가 얽혀있는 오언절구로, ‘은근한 마음 붉은 잎에 실어 보내니(殷勤思紅葉) / 인간 세상으로 쉬이 흘러가기를(好去倒人間)’이라는 뒷부분이 쓰인 접시도 있었을 텐데 발굴되지는 않았다.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면 어느 집 부부 전용 접시로 쓰였을, 요새 말로 커플 접시였던 셈이다.


이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사람 흔적은 하나도 없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미 학예사에게 물어 보니 “사람 두개골 윗부분과 뼛조각 몇 점도 발굴돼 보관 중”이라고 답했다. 크기로 보아 어른 것이란다. 신안선 발굴 당시만 해도 DNA 고고학은 개념조차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나주 복암리나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를 분석해 혈연관계를 알아내는 등 성과가 나오고 있다. 침몰하는 배의 마지막 증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이제라도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노염(老炎)마저 수그러드는데 세상의 시끄러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700년 전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벗어나보길 권한다. 오늘 부는 바람은 어쩌면 남해안에서 신안선을 뒤흔든 바로 그 바람인지도 모른다.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단행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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