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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우주인과의 교신」|최승호 「두번째 자루」|오규원「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시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 따라서 시는 여러가지의미와 형식과 기능을 갖게 마련이다. 교과서적 정의에 딱 들어맞는 시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고전적 작품이지 변형되어가는 오늘의 시는 아니다. 고정된 틀 넓히거나 벗어나려는 시도는 다음 세작품에서도 제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최동호의 시는 저승과 이송을 이어주는 소리의 기록, 또는 『우주인과의 교신』 (현대문학 5윌호) 으로 파악된다. 밤새도록 타자를 치면서 시인은 「꿈의 말들」 올 찾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차피 일상의 언어로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무리한 시도이므로 시인의 작업은 「어쩌면 은하계의 우주인이나 수신할지 모를/저 머나먼 영원한 발신음들을」 보내는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망망한 상상의 공간을 헤엄치며 나아가는/영혼의 언어들」 은 끝없이 우주로 파동치며 퍼져갈 소리의 창조임에 틀림없다. 그 소리는 현실적 소통에 사용할 수 없고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상상과 기억의 공간 속에서 아름답게 울린다.
나는 결코 다시 들을 수 없으리라/저물녘 강 둑을 밟고 돌아오던/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저녁 연기를 헤치며/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위의 시가 기록할 수 없는 소리를 들려준 반면 최승호의 짧은 산문시 『두번째 자루』 (현대문학·5월호)는 그릴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쪽을 누르시는군요 저쪽이 튀어나옵니다 보세요 이 길고 물렁물렁한 자루는 건드릴수록 보아 구렁이처럽 꿈틀댑니다. 제발 가만히 좀 내버려두세요 계속 그렇게 뭉개고 찌르며 들쑤시면 이 자루는 울부짖으며 일어나 당신 몸을 휘감고 삼켜버려요
이 자루 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꿈틀대는 형상은 우리의 눈앞에 실감나게 떠오른다. 억 누르고 괴롭게 굴면 울부짖으며 일어나는 이 자루의 내용물은 기체나 액체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있는 무엇이다. 그것은 사나운 짐승일 수도 있고, 침묵하는 다수의 민중일수도 있고, 우리가 당면한 현실일수도 있다. 구체적 형상속에 추상적 다의성이 내포된 작품이다.
오규원의 시 『봄· 나는 부활할 이유가 도처에 없었다』 (문학사상 5월호)는 고정관념의 파괴와 진술형식의 해체라는 점에서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른 모형을 보여준다.
인격화된 「봄」 은 「아지랭이를 혈관에 퍼질러」 놓고,「갈라진 아스팥트 사이로 들풀을 진격」 시키는 등 상투적인 「물증」 과 함께 부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물격화된「나」는「봄에게로 가서 어떤 의미가 되지」 않았고,「꽃이 되지」않았고, 「부활하지 않았다.」 부활하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데, 「나는/살아 있었으므로 부활할 이유가 도처에 없었다」 는 것이다. 도착된 시점·왜곡된 논리·풍자와 야유· 관법적 서술 등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전통시의 문법을 철저하게 부숴버린 이 작품은 얼핏보면 말장난 같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봄이 와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암담한 현실의 심층을 예리하게 투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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