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CNN·명품백이 자연스러운 세대…그들을 사로잡는 삶의 페이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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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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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창비
316쪽, 1만2000원

1982년생, 2011년에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해 소설집 한 권을 낸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작가 특성을 논할 때 ‘세대론’ 만큼 성긴 그물도 없지만 백씨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독자들에게 익숙한 90년대, 2000년대 작가들과 백씨 또래는 얼마나 먼가 혹은 가까운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가령 백씨는 80년대 학번들이 72년 10월유신에 대해 느끼는 시간적 거리 감각을, 87년 6·29에서 느끼는 세대랄 수 있다. 89년 해외여행자유화가 실제 삶에 변화를 가져와, 외국인 친구를 두거나 길고 짧은 해외 체류 경험쯤은 별난 일도 아니다. CNN 생중계로 9·11을 접하며 세상의 위태로움을 실감하고, 그런 한편 명품백을 구매하는 대동단결 흐름에 몸을 맡긴 적이 있는 세대다.

간략하게 스케치한 세대 특성이(그걸 세대 특성이라 할 수 있다면) 총 10편의 단편을 묶은 백씨의 이번 소설집 곳곳에 조금씩 녹아 있다. 삶의 풍경이나 조건이 바뀌었다고 아픔이나 절박함이 덜한 건 아닐 테니까 결국 바뀐 건 고민의 내용이고 세목이다. 간단히 말하긴 어렵지만 백씨를 사로잡는 주제는 미처 말로 해명하기 어려운 인생의 어떤 국면, 돌이킬 수 없는 아름다운 한 순간, 사랑했던 사람을 남겨 두고 살아 남은 이의 죄책감 같은 것들이다. 이런 주제들이 2010년대 작가들에게만 의미 있는 건 아닐 테니, 그런 점에서 백씨의 이야기들은 보편적인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백씨의 소설은 책 날개의 작가 사진 만큼이나 반듯한 인상이다. 최선의 한 문장을 얻기 위해 흔들리며 씨름한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취향 때문이겠지만 환상적인 설정의 ‘높은 물때’ 같은 작품이 흥미롭게 읽힌다. 예술가의 길을 포기한 채 파멸 만을 앞둔 듯한 ‘제’와 ‘윤’ 부부가 싱그러운 학교 후배 준오와 미영의 뜨거운 침실을 훔쳐보는 장면은 숨죽이고 읽게 된다. ‘길 위의 친구들’은 대학 동창인 나와 민아가 갑작스럽게 해남 여행을 떠나 겪는 갈등과 화해, 민아가 포르투갈로 여행가 화장실에서 경험한 낭패기가 눈길을 붙잡는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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