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교육의 요람 숙명여중·고80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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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숙한 품위와 현명한 지혜를 겸비한 현모양처교육」을 목적으로 1906년 문을 연 숙명녀중·고(교장정충량) 가 22일로 개교80주년을 맞는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 고종의 계비인 엄황비의 뜻에 따라 순수한 우리힘으로 세워진 여성교육기관으로 출발할 당시의 이름은 명신여학교.
처음에는 입학자격을 양가명문의 딸들로 제한하여 「귀족여학교」로 불리기도 했으나 1911년 학교이름이 「사립숙명고등여학교」로 바뀌면서부터는 일반교육기관으로 문호를 넓혔다. 첫신입생은 4명뿐이었는데 남녀가 엄격히 구별되던 시절이어서 이들은 한국최초의 여교장인 이정숙교장과 여교사들에게 교육받았다. 그때 새로운 학문을 가르칠만한 한국여성이 흔치않아 일본인여교사가 교단에 섰는데 일본어를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일본인가정의 한국인가정부에게 통역을 맡기는 등 일화가 많았다. 마침내 남자교사가 부임하자 처음 6개월동안은 남자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커튼을 치고 수업하기도 했다.
신여성교육을 반대하던 양반가정들을 이교장이 일일이 방문하여 부모를 설득해야했던 초기에는 기숙사비와 학비를 전혀 받지 않았다. 교과서와 지필묵도 무료. 학생들은 모두 매주 월요일 가마를 타고 등교하며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토요일이면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었던 숙명의 동맹휴학은 유명한 사건의 하나. 일본인교사의 민족차별및 불공평한 교사임용조치에 반발한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가자 학교측은 학부형들에게 이를 중재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학부형들 역시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중재역할을 동창회인 숙녀회가 넘겨받았으나 이 역시 일본화교육을 통렬히 비난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마침내 학생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올해까지 75회에 걸쳐 숙명이 배출한 졸업생은 3만5천15명. 교육계의 임숙재(전숙명여대 총장)·이숙종(전성신여자대학장및 이사장), 문단의 박화성·최정희·박완서, 체육계의 박신자(전국가대표농구선수), 예술계의 김복희 (성악가)·김정숙(조각가)씨등이 숙명출신.
숙명녀중·고는 미술·사진·서예·시화·문집·예쁜 엽서·꽃꽂이 전시회와 매스게임등의 개교기념 행사를 갖는다.<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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