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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지수 높인 전기요금 문제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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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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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경제부장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본계획’이 발표된 건 1999년 1월이었다. 규제 중심의 전력산업을 시장 중심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의 결단이었다. 당시는 한국전력공사가 발전(發電)·송전(送電)·배전(配電) 사업을 모두 독점하던 시기다. 3단계 계획을 짰다.

한전이 도매와 소매 독점해 시장 왜곡
판매경쟁 도입해 기형적 요금제 바꿔야

1단계는 발전 경쟁이다. 한전의 발전 부문을 분할해 사업자 간 경쟁을 유도하기로 했다. 2단계는 도매 경쟁이다. 배전 부문을 한전에서 분리해 다수의 사업자끼리 도매 입찰 구매 경쟁을 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최종 3단계는 소매 경쟁이다. 배전망도 개방해 배전회사와 기존 판매회사, 그리고 신규 판매회사가 소비자에게 전기를 파는 소매경쟁 체제 구축이다.

당시 정부는 10년 뒤인 2009년 1월까지 3단계 계획을 모두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 4월 한전에서 발전 6개사를 분할했다. 수력·원자력 1개사와 화력 5개사 등 6개의 발전 자회사가 분리돼 출범했다. 이게 전부였다.

노조의 반발이 거셌다. 2002년 2월 발전노조는 38일간 파업을 벌였다. 2004년 6월 노사정위원회 공공특위는 구조개편 기본계획의 2단계인 한전의 배전 부문 분할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이렇게 5년여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실패한 전력산업 개편의 역사를 들춘 건 올여름 국민의 불쾌지수를 높인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다. 한국의 전력 거래 시장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형이다. 전기 생산은 한전의 6개 발전 자회사와 일부 민간 발전회사가 맡는다. 문제는 이들 회사가 생산한 전력을 사주는 도매상은 한전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다. 한전은 도매로 확보한 전력을 소비자에게 독점으로 되판다. 소매상도 한전 하나뿐인 구조다.

한전의 전기요금 조정은 이사회를 거쳐 산업통상자원부의 승인을 얻으면 된다. 한전과 정부가 전기요금을 일방적으로 책정하는 건 이런 구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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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한전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시장형 공기업이다. 이익을 많이 올려 주주들에게 그 이익을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전기도 상품인데 요금을 정할 때 수요와 공급은 뒷전이다. 대신 물가 안정, 수출 산업 지원, 저소득층 배려, 농업 지원 등이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상장 기업이 정부의 지시 아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앞장서 하는 꼴이다.

현재의 전기요금 체제는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가정용 요금은 여름마다 요금 폭탄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누진제가 가파르다. 많이 쓸수록 급격하게 요금이 올라간다. 전기 과소비를 억제하고, 저소득층의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전기를 덜 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히 가족이 많은 저소득층일수록 전기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고소득 1인 가구가 가장 혜택을 본다. 이들은 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을 쓰고, 혼자 살기 때문에 전력 소비가 적다.

더구나 전체 전력 소비량 중 가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13%대에 불과하다. 가정에서 전기 좀 더 쓴다고 전기 예비율이 급격히 나빠지지는 않는다.

산업용과 일반용(상업용)은 정반대다. 산업 발전, 자영업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많이 써도 요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싸다. 상점들은 손님을 끌어들인다며 문 열고 에어컨을 펑펑 튼다. 산업용 전기의 과소비 논란도 늘 제기된다.

이렇게 전기요금이 왜곡된 원인은 분명하다. 판매시장에서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력 사용 패턴에 맞는 요금을 선택하려면 다양한 요금제가 전제 조건이다. 기본료가 비싼 걸 택할지 싼 걸 택할지, 어떤 피크타임 요금을 고를지 등등 선택의 폭이 넓어야 소비자들은 효율적 구매를 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요금제는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다.

OECD 회원국 중 전기 판매를 경쟁에 부치지 않은 나라는 멕시코, 이스라엘, 한국 등에 불과하다. 전기 판매가 경쟁 구도로 바뀌면 일시적으로 요금이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전력 구조개편에 성공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장기적으로 실질 요금이 내려갔다. 일본은 95년 발전 경쟁을 시작했고, 2000년 이후부터는 소매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에서 소매 경쟁이 도입된 이후 약 10년 동안 전기요금은 17% 정도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전력산업의 성패는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에서 갈린다. 스마트 그리드란 기존의 전력망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전력 공급자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실시간 정보를 교환하는 차세대 지능형 전력망이다. 공급자는 소비자의 전력 사용 현황을 파악해 공급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소비자는 요금이 비싼 시간대를 피해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어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할 수 있다. 스마트 그리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도 판매 경쟁은 필수다. 한전이 전력망을 개방하고, 경쟁이 보장돼야 다른 사업자들도 신사업에 뛰어들 수 있다.

이제 문서 창고에 폐기된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을 다시 꺼내야 한다. 도매와 소매를 한 회사가 독점하는 시장이 정상 작동될 리 없다. 개방과 경쟁,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