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의 독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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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9면

몇 년 전, 8월 말 개학을 앞두고 퇴근 무렵 학교의 건물 옆 사무실에서 화재가 발생했었다. 연기로 시작된 불은 조금 타고 꺼질 것 같았는데, 결국 내 서재까지 모두 태웠다. 그때 조금씩 아껴 모아둔 책들은 거의 소실됐다. 불탄 다음날 잿더미 속에 타다 남은 책들을 보며 이런 것을 ‘황당하다고 하는구나’ 하는 맘이 일어났다. 그 뒤 고전이든 뭐든 책을 일절 구입하지 않았다.


가끔 필요한 책을 찾으려면 그때 책 생각이 났고 아쉬움이 일었다. 그때마다 대학 도서관에 운동 삼아 가서 책을 빌리는 일이 자연스러졌다. 빌린 책을 보니 문득 퇴계 선생이 죽을 때까지 『소학』을 놓지 않고 실천을 했다는 글에 머물렀다. 동방의 성현이라 일컫던 분도 사실은 가장 어린아이가 본다는 소학 책을 옆에 놓고 실천하기에 바빴다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글을 이어갔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지않고 하루 종일 단정히 했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安否)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 소변을 보았으며 제삿날에는 고기나 술을 들지 않았다.


퇴계 나이 70이 돼 병이 깊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엔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 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정좌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퇴계선생이 시냇가에 배움터를 마련하고 시를 한 수 지었다.


시냇가에 비로소 살 곳을 마련하니흐르는 물에서 날로 새롭게 반성함이 있으리


20년만의 무더위라는 말이 그렇듯 밤마다 열대야에 시달린 올해 나는 뜬금없이 『소학』을 빌려 한줄한줄 줄치며 읽어 내렸다. 인생의 기본이 가장 하찮은 초동들이 읽은 책에 다 있었다. 아무리 지식이 넘치고 저장됐다고 해도 기본에 충실한 삶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번 여름은 정말 집밖에 십리를 넘지 않으리라 하고 두문분출하며 밖에 나가질 않았다. 그리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또한 오라는 사람도 없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는 것이 내 삶의 즐거움이 된 듯하다.


이제 풀냄새가 향기로워 진다는 입추가 지났다. 여름은 여름답게 더우니 좋고, 가을의 바람은 밤마다 조금씩 방안으로 스며드니 좋다. 매미가 우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정은광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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