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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정성 인맥 관리했지만 결국 남남…남는 건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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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0년간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2년 전 퇴직한 윤준열(58)씨는 올해 목표를 ‘가족과 더 많은 시간 보내기’로 정했다. 이달 초에는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부인과 단둘이 10일간 전국일주 여행을 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인맥을 관리했지만 대부분 소주 한잔 기울이기 힘든 남남으로 변했다. 남는 건 가족”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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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다. 한창 때 학연(學緣)·업연(業緣)을 가꾸느라 가족을 등한시하다가 은퇴 후에야 덧없다고 깨닫는다. 실제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신경 쓰는 인맥’을 묻자 20대는 ‘대학·동창·선후배’(53.3%)를 최우선으로 꼽았고, 30~50대는 ‘업무상 알게 된 인연’(38.4%)을 중시했다. 은퇴 후인 60세 이상 응답자가 ‘ 혈연’(39.5%)을 꼽은 것과 비교된다. 우리 사회가 유독 관계로 인한 피로증을 심하게 앓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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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유독 강한 집단주의=윤평중 한신대 철학 교수는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정체성보다 집단의 성취가 우선시돼 집단주의의 경향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강하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고층 아파트와 더불어 이웃 간의 정을 찾기 힘든 ‘분절 사회’로 바뀌었고 그 자리를 학연·업연 등이 대체했다. 이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 더 나은 삶의 지수 ’에서 한국인의 ‘커뮤니티’ 지수는 76%로 전체 38개국 중 멕시코에 이어 끝에서 두 번째였다. 이 지수는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측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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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목적 중심의 관계=우리 사회에선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맥을 잘 관리하는 것 자체가 능력으로 간주돼 왔다. 하지만 목적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는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의 저자인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 교수는 “그동안 ‘인맥이 경쟁력’이라는 믿음으로 목적 중심의 관계를 맺어 왔다. 목적이 사라지면 희미해진다는 걸 깨닫는 순간 허탈해진다”고 말했다. 10여 년간 해온 사업을 최근 정리했다는 노영길(56)씨는 “치열하게 인맥을 관리해왔는데 정작 은퇴 후엔 마음 둘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인맥 과잉시대 부작용 줄이려면
사라진 공동체, 학연 등이 대체
인간관계 맺기 자체를 능력 간주
SNS로 인맥 넓어졌다 착시 불러
가족의 날, 조기 퇴근의 날 등
개인 시간 보장할 제도 늘려야

◆SNS가 부채질=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주는 ‘인맥 착시효과’도 피로를 가중시킨다. 배영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SNS 때문에 하루 종일 사람들과 연결돼 있는 것 같은 ‘SNS 인지 왜곡’이 생긴다”고 말했다. IT 전문가인 박용후 PYH 대표는 지금을 ‘난중(亂衆)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그는 “알 필요 없는 소식까지 듣게 되고, 내 소식은 불특정 다수의 검열을 받게 돼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관계 피로증’을 줄이려면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나치로 상징되는 집단주의 국가였던 독일은 제도적 장치를 두루 마련했다. 2013년부터는 퇴근 후 상사가 업무로 연락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국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매주 수요일이나 금요일을 ‘가족의 날’로 정해 6시에 정시 퇴근토록 하는 게 대표적이다. 삼성이나 현대차그룹 등 일부 대기업도 일주일 또는 한 달의 하루를 ‘조기 퇴근의 날’로 정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공적 업무와 개인적인 시간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만 제대로 분리시켜줘도 피로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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