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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실패한도전」2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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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저도해수욕장에서 대통령과의 모처럼의 간담이 있었다. 그날 저녁 이후락실장과 기자 둘은 진해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그 무렵은 정구영의장등 공화당 일부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기실 이유가 있다면 박대통령이 이실장을 신임한다는 질투(?)도 있겠지만- 이실장해임을 건의하고 있을때 였다. 진해로 내려오기 전 청와대에서 정당의장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끈덕지게 이실장의 해임을 종용했지만 사실 뾰족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실장은 비서실장이 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여당의 불신임을 받는것이 무척이나 착찹했던 심경같다. 이날 밤 식사가 끝나고 기자들과 술판이 벌어진 자리에서 기어코 쌓였던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평소 모든 일에 세심한 그도 몇잔 들이켠 술탓이었든지 제법 흥분 되어 있었다. <이봐요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 말야. 심심하면 물러가라니…. 대통령 비서지 국회의원 비서란 대통령께서 그만두라면 언제든지 그만둘 용의가 있어. 하지만 자기네들이 뭔데 날 그만 두라는거야. ××을 팔더라도 국회의원을 한번 해보아야 겠어…◇그는 주먹으로 상을 팡팡 두드리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나도 그의 말에는 동감이어서 비서의 거취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것이니까 누가 뭐라해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이상은 66년11월 발간된 『영시의 횃불』 의 한 구절이다. 65년 여름휴가인 이 여름 공화당내 이후락진 압력은 판정패로 결말난 때였다. 그때 이실장은 공화당의 압력을 뿌리치고 대통령의 신임이 재확인돼 그의 권력을 더욱 넓힐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니까 그가 술자리에서 털어놓은 울분은 울분이기 보다는 승리의 시위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그때의 공화당의 좌절을 정씨는 이렇게 들려주었다.
-6·3계엄해제 협상의 이면을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만 했던 당으로서는 더욱 이후락실장의 퇴진이 절실한 문제가 되었어. 그런데 대통령은 약속만하고 실천은 안해. 듣자니까 대통령은 이후락에게 좀 쉬는게 어떻겠느냐고 했다는거야. 그러자 이후락군은 각하의 뜻이라면 기꺼이 물러나겠지만 당의 압력때문에 자진해 사표를 쓸수 없다고 했다는거야. 눈물까지 흘리며 당의 압력에 항의했다는 것인데 이건 내가 대통령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고 소문이지. 이때부터 나는 이후락군이 들어오면 통 말을 안했어. 입을 다물었지. -각하하고 저하고 정책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데 왜 자주 이후락군을 입회시킵니까. 그는 사무관 입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그 이후부터는 나하고 얘기할 때는 이후락군을 못 들어오게 했어. 분명히 대통령은 들어오지 말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또 들어와. 들어와서 저만치 서있으면 내가 입을 다물고 그러면 대통령은 <실장은 좀 나가지> 그런단 말야. 그러면 그제서야 다시 나가고, 그런 신경전이 벌어지곤 하는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어. 그래 하루는 백남억·민관식 두사람을 데리고 들어갔어. 그들도 비서정치는 안된다는 생각들을 갖고있던 사람들이야. 우리들 논의는 대통령이 비서실을 통해서 하는 정치에 대해 공화당이 책임을 지게된다, 그러니 비서정치를 우리가 그저 쳐다보고만 있을수는 없다, 그렇게 모두 공명을 해서 들어간거야. 내가 먼저 얘기를 했어.
-각하께서 누차 이후락군을 해임하겠다고 말씀을 하시고도 안하시니 어쩐 까닭입니까. 지금 항간에서는 소내각의 쪽지 정치라는것이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어쩌려고 그점에 대해서 등한시 하십니까.
내가 정면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얘기를 했어요. 민관식과 백남억도
-역시 정의장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항간의 소문이 나쁩니다. 이실장을 해임하시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좀 민망했던지
-2∼3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갈겠읍니다.
이런 얘기를 했어. 그래서 이제는 청와대 비서진에서 나오는 잡음은 일소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하며 비서실장 교체를 기다렸지. 그랬는데 역시 이번에도 2∼3일은 커녕 열흘을 기다려도 아무런 조치가 없어.
그런 기다림이 2주일쯤 됐을때야. 공화당 당무회의에서 김용태군이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씨의 해임을 총재인 대통령께 건의합시다라는 제안을 해. 대부분이 찬성을 하고…. 침묵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나는 이 문제는 당의장인 내게 맡기라고 타일렀어.
청와대 비서실 인사는 대통령권한에 전속되는 것이지 당에서 공식으로 간여할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당 총재이기는 하지만 내각과 비서실이라는 기구의 성격은 구분해야하지 않겠느냐. 당에서 간여한다는것은 총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 비공식석상에서 건의하는 것이지 당무회의가 의결한다는것은 대통령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 된다. 당은 대통령직권에 속하는것중 정책적인것과 행정사무에 속하는것과는 구분해야 하니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주시오. 기회 있을때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 내가 비공식으로 건의를 하겠소. 이렇게 말했더니
-정의장님 그것은 너무 지나친 형식론입니다. 당무회의가 전원일치로 가결하면 안될것 없는것 아닙니까. 행정사무와 정책을 구분한다지만 그의 행정사무를 문제 삼는것이 아니라 정책문제에 대한 간여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라고 반박을 해. 김용태 군은 철회를 않고 모두들 찬성해서 결의를 해.
그래 나는 허허 웃으면서 <늙은이 말을 들어야 옳은데 어째서들 이러시오>하고 말았어. 어쨌든 결의를 집행하는 것은 당의장인 내게 달렸으니 적절히 처리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지.
그랬는데 다음날 청와대에서 당정연석회의가 열렸어. ·
그날도 국무의원들은 돌아가고 당무회의를 열어 몇가지 안건을 처리하고 그럼 이 정도로 오늘 당무회의를 그만하고…라고 내가 말을 하는데 민관식군이 벌떡 일어서더니
-어째서 당무회의에서 결의한것은 말씀안하십니까.
-아 그것은 나한테 맡기라고 했는데 왜 그래요 라고 했더니 김용태군이 일어나서
-아니 당무회의에서 결의한것을 의장에게 맡기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대통령이 의아해서 -무엇을 가지고 그러는 겁니까.
-아 사실은 이후락군 해임을 총재께 건의키로 당무회의에서 결의를 했는데 나한테 맡기라 해도 자꾸 결의를 했다고 하니 딱합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아래를 쳐다보고 한1분동안 침묵을 지키더군.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정색을하고
-대통령실의 비서실에 관한 인사문제는 대통령에게 일임하시지요.
이리 되니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긴장되고 침울하고. 그래서 내가 이것으로 오늘 당무회의를 끝마침니다라고 산회선포를 했어.
대통령이 퇴장을 하고 나도 곧장 일어서서 대통령집무실로 따라 들어가서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실에서 얘기하는것은 좋지만 당이 공식적으로 대통령한테 건의한다는 것은 대통령비서실이 단순한 사무기구라는데서 당하고의 관계로 보아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했지만 워낙 비서실 인상이 좋지않아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양해를 하시고….
-이거 너무들 하십니다.
대통령이 이거 너무들 하십니다 그러는데 내가 뭐라고 해. 더우기 자기에게 일임해달라고 했으니 더는 뭐라고 할말이 없어.
그래 그 뒤로는 다시는 비서실장 경질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않기로 작정을 했어요. 다만 나는 굳게 결의를 했수다. 당의장을 그만두어야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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