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김수환 추기경에게 듣는다|인터뷰 성병욱 편집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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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개헌. 민주화. 학원소요. 계층간 격차. 근로현장의 문제 등 이사회의 여러 대립 현상이 또다시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입장을 달리하는 사회 제 세력간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가 요구되는 시대다.
화해의 일치의 처방을 모방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12일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서울 교구청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의견을 들어보았다.
-최근 교황청이 발표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은 남미의 해방 신학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사제들의 현실 참여폭을 넓히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있는 것 같습니다. 이 훈령으로 현실참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에 변화가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가톨릭은 원래 행동이 느립니다. 이 훈령으로 현실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근본태도가 달라진 건 아닙니다.
이번 훈령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교회의 기본사명을 강조한 것이죠.
물론 남미지역에선 좀 고무된 점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가톨릭의 현실참여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아요.
아직 전문은 못 봤는데 곰곰이 읽어보고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냐, 참된 해방은 무엇이냐에 대해 깊이 묵상을 해 볼 생각입니다.』
-필리핀 사태에서 「하이메·신」추기경과 가톨릭 교회가 「마르코스」의 퇴진과 신 정부 출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교황께선 「신」추기경의 이 같은 역할에 우려를 표명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추기경께서는 필리핀 사태에서의 「신」 추기경과 가톨릭 교회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신」추기경은 급진적인 분이 아니고 어떤 면에선 보수적인 분입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신」추기경은 선거전부터 「아레발로」같은 훌륭한 신학자들로 팀을 구성해 어떻게 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 또 인간해방을 위해 옳은 것이냐를 놓고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고 의논했다고 해요.
사태가 끝난 직후 그에게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필리핀이 국민들의 일치단결 속에 번영을 누리기 바란다」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고 그에게서도 「고맙다」 는 회답이 왔었습니다.」
-해방 후 40여 년간 우리가 겪은 큰 변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보는 눈과 대상 측면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가 발전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거나 후퇴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우리 나라가 적어도 물량적인 면에서는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인간다운 삶이란 관점에서 보면 물음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군요. 농민들의 부채가 심각하고 봉급이 채 10만원도 못되는 노동자가 꽤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도시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살던데 살지 못하고 자꾸 변두리로 옮겨가야 하는 도시 빈민들이 느낄 패배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재개발의 목적이 무엇이든 원래 주민들에게 구체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되지 않겠어요.
「네루」는 정치를 백성의 눈물을 닦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피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어서야 사회 안정이 이루어질까 걱정입니다.
결국 외형적인 면에서는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정말 인간다와 졌느냐는 면에서 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국토분단의 고통에 더해 국내적으로도 정치·경제·사회적 갈등으로 어려운 국면이 조성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의 해결계기도 생기곤 했었는데….
『나는 지금이 바로 그 계기가 아니냐하는 생각입니다. 고대 교수 한 분이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결국 인간답게 살자는 것 아닙니까.
대학교수·학생·노동자들의 소리와 움직임이 모두 인간으로서 해방·자유·인간다운 생활을 갈구하는 것이며 결국 민주화의 부르짖음으로 통합니다.
내가 지난번 부활절 강론 때도 얘기했지만 민주화가 될 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민주화의 요체가 개헌이라는 것이죠』
-개헌이라고 해도 재야와 학생 일부에서 주장하는 이른바「민중헌법」제정론도 있고, 야당에서 내세우는 대통령 직선제 주장도 있고 그밖에 내각책임제· 대통령 국회간선제 등 여러 갈래의 주장이 나오거나 나올 것으로 봅니다. 추기경께서는 개헌이라고 하실 때 혹시 염두에 둔 제도가 있습니까.
『나의 개헌발언에 대해 정부 쪽에선 야당 편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게 아니죠. 내 얘기는 민주화 작업을 정부의 이니셔티브로 추진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앞으로 분명한 스케줄이 보일 때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집권 측이 우리가 정권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우리도 국가를 위해 나름대로 봉사를 해 왔다, 국민이 원하면 국민을 위해 민주적 개헌을 하자, 다만 우리 앞에는 여러 어려운 고비가 있으니 질서 있게 해나가자는 빈 마음을 보이면 야당의 개헌추진본부 현판식도, 학생데모도 없어질 것 아닙니까. 그렇게만 되면 개헌의 내용이야 국회에서 공개토론을 통해 국민의 뜻을 모아 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개헌문제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그런 발언을 하신 건 결과적으로 본의는 아니더라도 한쪽 편을 드신 셈이 되었습니다. 평소 추기경을 존경하는 사람 중에도 이 문제를 놓고 막상 추기경 같은 분의 중재가 필요할 결정적 시기에 그러한 역할을 하시기 어렵게 돼 버린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나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에서 「89년에 하자」는 제의를 할 때 야당이나 재야나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걸 몰랐겠습니까.
투쟁으로 나올게 뻔한데도 왜 그렇게 하는지 납득이 안가요.』
-추기경께서도 그러신 것 같고 전체적으로 천주교 사제들이 유신시절엔 현실문제에 대해 상당히 공개적인 의사표시를 하다가 80년대 들어 목소리를 줄이는 것 같더니 교황의 방한이후 다시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어떤 변화의 계기가 있습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기본적인 생각이 달라져서라기보다 어떻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냐를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상황이 과거보다 말로서 어떤 결실을 얻어내기가 더 어려워진 게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박대통령 시절엔 기도회를 한다든가 어떤 집회와 말을 통해 압력이 가해지면 정부 쪽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어요. 그러나 힘이 전면에 나서는 때에는 공개적인 말보다는 사적으로 조용히 얘기하는 게 작은 것 하나라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있지요. 예컨대 양심수의 감형 같은 게 그런 것입니다.
늘상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우리도 사회정의니 뭐니 떠벌리지 않고 순수복음만 전할 수 있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실해요. 10·26이후 그런 때가 오지 않았나 해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방식이 정말 옳은 것이냐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종교인들이 정치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발언이나 활동을 헌법에 규정된 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왔는데 이런 입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종교란 사람의 심성을 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전체의 정신적· 윤리적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게 우리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범주 안에 정치나 경제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봐야겠습니까? 정치·경제를 제외하고「정신적인 것」만 향상시킬 수가 과연 있겠습니까?
오히려 밖에서 교회측에 교회는 외형적으로 번창해 나가는데 왜 이 나라의 정치와 사회윤리·빈부문제는 이 모양이냐고 따져야 할겁니다.
정· 교 분리를 자기 편리대로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종교는 1차 적으로 가난하거나 눌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종교기관에서도 교회를 크게 세운다든지 하는 현시적인데 보다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런 약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가톨릭을 포함해 종교가 해야할 일은 무엇으로 보십니까.『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해선 다같이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불가피하게 성당을 신 개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 빈축을 사지 않도록 자생하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건물 짓는 일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애를 쓰는 것도 사실입니다』
-천주교 주교들의 근로현장체험 프로그램이 지난해 여름부터 있었고 추기경께서도 사북 탄광을 다녀오셨다지요.
프로그램의 취지와 체험하신 것이 있으시면·‥.
『이런 것은 곁으로 드러내서 하면 안 되는데…(웃음).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해야되는 것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 경우는 체험이라기 보다는 방문이었죠.
막장까지 들어가 그분들이 어려운 여건가운데 우리 나라 에너지자원개발에 수고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 대한 사업주와 정부의 배려는 충분한가 하는 점등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바람직한 언론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언론이 어려운 여건아래 있지만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지금까지 언론이 취한 태도는 여도 치고 야도 때리면서 자기의견은 얘기하지 않고 보호망을 치는 듯한 인상이 듭니다. 이제는 결과적으로 여를 지지하게되든 야를 지지하게되든 「이 시대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거다」 라는 점을 정정당당하게 제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인간구원이라고 .해도 좋고, 문제해결이라고 해도 좋고, 결국 정의와 사람이 함께 조화될 때 그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치자의 입장에서 너무 정의만을 강조하다보면 융통성 없는 법치로 흐르기 쉽고, 피치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강조하다보면 보복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한 국민과 위정자들의 올바른 위상은 어떠해야한다고 보십니까.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 밑에 인간사랑이 깔려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부정· 부패로 이웃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을 해소해주려는 사랑에서 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것이지요.
정의를 외치면서 미움이 수반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해방이 우리를 억압하게 되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또 인간의 참된 사랑은 진리를 바탕으로 해야하고 비폭력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없는 정의는 아무리 그 목적이 좋아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비인간화로 떨어지게 됩니다.
「간디」 선생은 독립투쟁 과정에서 진리에 입각한 독립투쟁을 해야한다, 진리를 희생시키는 독립은 오히려 얻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강조했어요.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는 사람은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즉 농민·노동자·도시빈민 등에 애정을 가져야지요.
위정자들이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줄 때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록=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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