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무량스님, 한국戰 참전 부친과 訪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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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아침 저녁으로 평화의 종소리를 울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미국의 그릇된 욕심을 일깨우겠습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무량(無量) 스님(43.속명 에릭 버럴)의 말이다. 22일 방한한 그는 서울 인사동 조계사 인근 찻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라크 공습을 강행한 부시 대통령에게 솔직히 실망했다"며 "평화의 종이 미국 사회에 민주주의의 참뜻을 전하는 상징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무량 스님이 한국 불교를 접한 시기는 1979년. 미국 예일대 지질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하다 서울 화계사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83년 한국을 찾아 충남 예산 수덕사와 전북 군산 태고사에서 수행했다. 90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인을 대상으로 포교 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그는 200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북동쪽 약 1백60㎞ 떨어진 테하차피의 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짓기로 하고 사재를 털어 땅을 사들이고 공사를 벌였다. 포크레인으로 직접 땅을 파기도 한 그는 지난해 법당을 완공했다.

방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50여년 전 한국전쟁 때 포병교관으로 참전했던 속가(俗家)의 부친(프랭크 스튜어트 버럴.73) 머리에 각인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는 한편 미국 태고사에 평화의 종을 세워 미국인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서다. 역시 예일대 졸업생인 그의 부친은 현재 뉴욕에서 세무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27일 열리는 한국전쟁 휴전 50주년 기념식에 부친이 초청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함께 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 '전쟁의 나라'로 기억하고 있거든요. 또 명문대를 졸업한 아들이 갑자기 한국 불교에 심취해 승려가 되었으니 한국을 좋게 볼 이유가 없었죠. 이번에 제가 수행했던 사찰과 불교 문화재를 돌아보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아버지께 알려드릴겁니다." 최근 화해하긴 했으나 출가 이후 내내 불편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농담 한마디를 했다.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의 예일대 후배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후배인 셈이고요. 앞으로 건립될 평화의 종이 우리 세사람을 이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웃음)

그는 "평화의 종에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평화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을 담은 이 종이 세계 지도자의 눈을 뜨게 하고, 또 그들에게 지혜를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무량 스님은 다음달 중순까지 한국에 머물며 다양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평화의 종 건립 구상을 한국 불자들에게 제안하고, 지리산 실상사와 파주 보광사에 각각 열릴 생명.평화.통일 기원 간담회와 2003 불교평화포럼(다음달 9~10일)에 참석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도 방문할 예정이다. 아버지에게 '광주의 비극'과 '한국인의 민주화 의지'를 보여주고 싶어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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