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를 아시나요…그들의 기구한 삶, TV서 첫 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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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김학범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사진 MBC]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관동군에 강제동원된 조선 청년에게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날이었다. 그러나 곧 더 큰 절망의 날로 바뀌었다.

이들은 소련군에 전쟁포로로 넘겨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3년 넘는 추위와 배고픔의 포로 생활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쓰러졌다.

억세게 운좋은 일부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에선 그들은 적성국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감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의 기구한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가 시청자들을 찾는다. MBC의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화자는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일본 게이요 대학교수다. 그는 한국인 억류자 소송을 도운 일본인 오구마 겐지(小能謙二)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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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치타주의 포로 집단 묘지. [사진 MBC]

관동군에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 중 약 1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 전역의 포로 수용소 267곳에 수용됐다. 이후 그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은 꿈도 못꿨다.

“지금 나는 한국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나라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해요.”(시베리아 억류자 김기용씨)

91년 시베리아 억류자들은 ‘삭풍회(朔風會)’를 만들었다. 2003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말소됐다는 이유로 소송은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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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마 겐지(왼쪽)와 .오구마 에이지 부자. [사진 MBC]

모든 일본인이 그들을 외면한 건 아니었다. 오구마 겐지가 나섰다. 그 역시 전쟁포로로 소련군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그는 한국인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청구 소송에 공동 원고로 참여했다.

오구마 겐지는 소송 참가 이유에 대해 아들 오구마 에이지에게 “속죄의 마음이 있는 거야”라고 설명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개인사를 『일본 양심의 탄생』로 엮었다.

“위안부 할머니처럼 매스컴이라도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그것조차도 몰라요. 지금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시베리아 억류자 김기용씨의 한맺힌 말이다. 현재 한국의 시베리아 억류 생존자는 10명이 안된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김만진 PD는 “더 늦기 전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들에게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송은 15일 낮 11시 50분.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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