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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유산 분쟁에 임하는 남자들의 속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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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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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장남인 그 중년 남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동생 넷을 불러 모았다. 부모님이 남긴 재산을 낱낱이 공개한 후 그것을 5분의 1씩 균등히 분배했다. 출생 순서나 동생 각각의 경제 사정은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다. 지인으로부터 그의 오빠의 유산 배분 방식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혼자 생각했다. 본디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거나, 성장기에 부모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거나, 젊은 시절 마르크스 책 몇 권을 읽은 모양이라고.

개인적으로 유산 싸움이라는 행위에는 심리적 함의가 많다고 느껴왔다. 성장기에 부모의 지원을 충분히 받았을 텐데, 부모의 재산 형성에 노력을 보탠 일도 없을 텐데 유산의 소유권을 의심 없이 주장하는 태도부터 그랬다. 그것은 유아기 태도와 흡사해 보였다. 아기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고 보살핌이 부족하면 떼쓰는 것이 허용된다. 유산 분쟁에서 형제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광경도 이상했다. 그것은 아동기 모습 같았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길이 누구에게 더 오래 머무는지, 눈길의 온기가 어떻게 다른지 감지한다. 경쟁심의 뿌리가 거기 있어 성인이 된 후에도 아파트 평수나 자동차 배기량을 비교한다. 유산 분쟁은 형제들이 평생 경험해 온 경쟁심의 연장된 형태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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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분쟁이 곧 애도 행위라는 사실은 나중에 이해되었다. 부모를 잃은 사람의 정상적인 감정은 상실감과 슬픔이다. 사랑하는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받을 거라 기대했던 사랑마저 영원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상실을 수용하고 슬픔을 경험하면 좋을 텐데 우리들 대부분은 먼 길을 돌아 그곳에 다다른다. 상실에 대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등의 애도 과정을 거친다. 유산을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이는 이들은 우선 부모의 죽음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엉뚱한 갈등을 동원하는 듯 보인다. 형제를 향해 분노를 투사하고, 유산 액수를 협상하고, 슬픔 대신 돈을 수용한다. 유산 분쟁으로 애도 과정을 대체하는 셈이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어느 교육 기관에서 배우는 것보다 많은 것을 부모의 죽음에서 배운다고 한다. 부모가 세상을 뜨는 순간 무의식 깊은 곳에 있던 의존성·욕망·시기심 등 모든 감정이 방향을 잃는다. 힘들게 부모를 떠나보내면서 진정한 어른이 되는 분리, 개별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부모 유산을 균등하게 나눈 저 중년 남자는 새롭게 보인다. 그는 부모와의 분리, 개별화 과정을 잘 이행한 성숙한 개인이었던 셈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