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창간된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민음사) 8·9월호에는 김애란의 신작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이 실려 있다. 2년 전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고 할머니와 둘이 사는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노찬성이다. 암환자였던 아버지가 고의로 낸 사고로 의심받아 유족은 보험금을 못 받았다. 홀로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는 가끔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한다. 정작 찬성은 ‘용서’가 뭔지도 모르지만 독자는 짐작되는 바가 있어 스산해진다. 착한 사람들조차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서, 착한 그들이 끝내 버릴 수 없는 죄책감에 대해서.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어느 날 찬성은 휴게소 공중화장실 근처에서 버려진 늙은 개를 발견한다. 완강히 거부하는 할머니에게 찬성은 불쑥 개를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본인도 깜짝 놀랐다. (…) 태어나 처음 해 본 말이었다.” 찬성은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기쁨인지를 알아 간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의 한쪽 얼굴일 뿐이다. 개 ‘에반’이 암에 걸려 안락사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자 찬성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함께 감내해야 하고 극단적 선택조차 고민해야 하는 엄중한 일임을 배운다.
안락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찬성은 전단 아르바이트를 해 11만4000원을 번다. 그런데 병원에 갔더니 하필 “상중(喪中)”이라 며칠 문을 닫는다는 것. 그때 찬성은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에반을 떠나보낼 시간을 미룰 수 있다는 안도감만은 아닌 것이었다. 찬성은 어렵게 모은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조금씩 쓰기 시작한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그럴듯한 합리화도 해낸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것일 찬성의 나약함을 지켜보는 일은 아프다. 그러나 이것은 김애란의 소설이다. 당연히 거기서 더 나아간다.
에반이 사라진다. 처음 에반이 발견된 장소 부근에서 찬성이 피가 밑으로 새어 나오는 불룩한 포대를 발견했을 때 근처의 누군가가 말한다. “아이, 진짜라니까. 그 개가 일부러 뛰어드는 것 같았다니까.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까지 다 읽고 나면 비로소 이 소설이 반복의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을지 모를 어떤 마음의 사건이 찬성과 에반에게서 반복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 책임지는 일이 어째서 나를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가를.
이것은 그저 할머니와 소년과 개 한 마리가 나오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 안에 책임과 용서에 대한 윤리학적 성찰이 이토록 아프게 담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어리둥절하다. 언젠가부터 김애란의 단편을 읽을 때 나는 좀 이상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무리 김애란이라도 쓰는 것마다 좋을 수는 없다. 당연히 실망할 수 있고 그게 이번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각오는 머쓱해졌다. 소설의 본질과 미래에 대해 세상이 어떤 갑론을박을 하건, 어떤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들은 그냥 조용히 좋은 소설들을 써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