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국 헌법 제1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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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인 (김병로)이 대법원장 시절이다. 법무부 국장 몇이서 신년하례를 갔다. 그 중에는 김갑수씨 (당시 법무국장)도 끼어 있었다.
세배를 받은 가인은 김갑수씨를 보고 『춘부장도 안녕하신가?』하고 인사를 건넸다. 가인과 김갑수씨의 부친과는 친분이 있었다.
이 순간 김갑수씨는 버럭 화를 냈다. 『뭐야, 건 알아 뭐해! 내 기를 꺾겠다 이거지!』 옆에 있던 동료들은 인사가 아니었다. 이리 말리고, 저리 말리고, 별수를 다 썼지만 시비조는 점점 더해만 갔다. 실은 전작이 있는 김갑수씨였다.
며칠 후 이들 일행은 어깨가 처져 가인택을 찾아갔다. 진사 방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대면한 가인은 도무지 내색을 않고 다른 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정중한 언사로 세수에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가인은 그 말을 듣고 금시초문인 양 말했다.
『자네들은 「명정 40년」을 쓴 수주의 「주국 헌법」 제1조도 모르나? 주석에서 있었던 일은 부문에 부치는 법이라네.』
바로 수주 (변영로) 자신의 명정 진태기행 중엔 별의별 일들이다 많다. 하루는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 등 세 주선과 수주가 고하 (송진우)로부터 원고료 50원을 선불 받아 서울 명륜동 어디서 쾌음, 호음 했다.
때마침 소나기가 퍼붓는데 이들은 명담, 고담, 농담, 치담, 문학담 끝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옷이 젖을 수밖에.
이때 공초가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했다. 이들은 근처에 매어 있던 소에 올라타고 혀를 찼다. 기상천외의 스트리킹이 벌어진 것이다.
수주의 말을 빌면 『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났다』고 하니 명륜동 큰길까지 나갔던 모양이다.
이것은 취광 치고는 유쾌한 광이지만, 수주의 주정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주선들은 그것을 호쾌하게 받아주었고 월탄 (박종화)은 그를 두고 「난이고 옥」이라고까지 했다.
그런 우정이 부럽고, 그런 주정을 받아주는 의리가 부럽다. 필경은 그 나름으로 주의 도가 있고, 주의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주도 번번이 지나친 일들을 자괴자탄 했다. 그래서 명정기도 쓰노라고 했다.
어언 시속은 바뀌어 오늘의 주석은 어디에 예가 있으며 도가 있는가. 한때는 우리 청년들에게 향음 주례를 가르친다고 했는데, 우선 집안에서나마 그런 것을 시범하는 어른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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