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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보다 국회가 무서워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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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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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
논설위원

우리 국회는 오랫동안 호통만 쳤지 실속이 별로 없는 종이호랑이였다. 법안이란 으레 정부가 만드는 것이어서 입법부는 통법부로 불렸다. 그럴 만도 한 게 김영삼 정부 땐 정부 제출 법안 처리율이 97.8%, 김대중 정부에선 94.5%였다. 일이 되게 하는 건 청와대였다. 의원님들은 디딤돌보다 ‘되겐 못하지만 못 되게 할 수 있는’ 걸림돌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대 국회는 그런 ‘물 국회’가 아니다. 문을 연 지 두 달 만에 1000건이 넘는 의원 입법안을 쏟아냈다.

선진화법 국회론 엉터리·무책임 입법도 쉽지 않아
정치가 정치를 못 푸니 정치·외교 줄줄이 법정으로

숫자도 많지만 내용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두 손을 들게 생겼다. 우선 정부 시행령에 위임한 걸 법률로 돌리겠다는 법안이 많다. 대기업집단 기준 금액이나 중소 신용카드 가맹점에 적용하는 우대수수료율까지 법률에 명시한 법안이 올라와 있다. 또 여성 미화원의 남자 화장실 청소 금지 등 시시콜콜한 규제부터 기업 임직원의 최고 임금을 최저 임금의 30배(약 4억5000만원)로 제한하는 임금 규제법도 발의됐다. 정부가 법안을 내려면 관계기관 협의, 입법 예고, 규제 심사, 법제처 심사, 차관·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의원 입법엔 입법 예고나 심의가 생략돼 마구잡이 입법이 가능한데 태반이 이런 식이다. 가뜩이나 과잉 범죄화로 국민 4분의 1이 전과자인데 모두 통과되면 전 국민이 전과자가 될 거란 비판이 나온다.

여기에다 조만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하늘을 찌르는 의원님 위세엔 날개가 하나 더 달린다. 기업이 공무원에게 로비할 길은 막히지만 국회의원은 ‘공익 민원’이란 이름으로 당국에 청탁을 할 수 있다. 결국 기업 로비는 국회로 몰릴 수밖에 없게 됐다. 여소야대 국회다. 기업에선 야권에 줄이 닿는 의원 보좌진을 찾느라 혈안이라고 한다. 육사 공화국, 검찰 공화국에 이어 국회 공화국 논란까지 나왔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란 말이 헛말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세계 어떤 나라, 역대 어느 국회보다 막강한 수퍼 갑 의원님인데 실제 국회 돌아가는 꼴은 꼭 그렇지도 않다. 국회가 도무지 열리지 않고 열려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황당하고 무책임한 법안을 심의하는 것마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달엔 집권당이 국회를 보이콧하는 코미디가 연출됐는데 8월 국회가 다르지 않다. 국회 선진화법이 큰 이유다. 여소야대지만 두 야당 의석 수를 합쳐도 ‘5분의 3’이 못 돼 원내 3당 가운데 어느 당이라도 반대하면 국회는 굴러갈 수 없는 구조다. 멀리 갈 것 없이 19대 국회에서 의원 입법 가결률은 10%가 안 된다. 자동폐기 법안만 1만 건이 넘는다.

정치를 정치가 풀어내지 못하니 대한민국 정치와 외교는 줄줄이 헌법재판소로 간다. 당장 선진화법이 그랬고 김영란법이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을 비롯해 신행정수도특별법, 통진당 해산심판, 국회의원 선거구획정도 따지고 보면 헌재에서 다툴 일이 아니다. 정치권이 해결할 정치 현안이고 문제가 있으면 국회가 개정하면 될 일이다. 그게 국회 일인데, 손발 묶인 국회는 움직이지 못한다. 후진성에 무능·불임·비효율까지 더해져 기우뚱거리니 국회 공화국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원 공화국이고, 더 정확하겐 법관 공화국이다. 그리고 나랏일을 법정에 세운 건 다름 아닌 선진화법 국회다.

국회의원보다 국회가 무섭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린 거꾸로만 달린다. 그러니 선거로 의원들이 바뀌어도 빙빙 겉도는 국회는 늘 그 타령이다. 여소야대든 여대야소든 별 관계도 없다. 국민 무시가 이만 저만이 아닌 셈이다.

국회를 이렇게 만든 건 1차적으로 새누리당이고 박근혜 대통령이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소수당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선진화법 도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선한 의도였다 해도 식물 국회는 19대로 충분하다. 20대 국회는 선진화법부터 고치는 게 순서다. 야당이 개정안을 발의한 마당이니 여당만 동의하면 될 일이다.

선진화법에 앞장섰던 이정현 의원이 새누리당 새 대표에 선출됐다. 결자해지 책임이 무겁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