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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최저임금위원회를 소환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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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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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일주일 전 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 고시됐다. 시간당 6470원이다. 올해보다 7.3% 올랐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했을 때 209시간 일하면 월 135만2230원이다. 여기에 상여금이나 수당, 복지비는 제외된다. 사실상 기본급이란 얘기다. 지난달 21일 최저임금위원회가 의결한 뒤 고용노동부가 이의신청을 받았다. 강하게 반발하던 노동계는 이의 제기를 안 했다. 경영계도 불만이 있는 양 시늉만 했을 뿐 슬쩍 비켜났다. 유일하게 소상공인연합회가 재심의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저임금 결정고시와 함께 또 사라진 국가기관
정치 문제로 변질된 판을 바꾸려는 노력 보여야

그리고 최저임금위원회는 늘 그렇듯 또다시 사라졌다. 2018년 최저임금 심의가 시작되는 내년 4월에야 슬그머니 나타나 “나, 살아 있다”고 할 게다. 수년간 반복돼 온 패턴이다. 최저임금위원회의 등장과 동시에 온 나라가 판에 박힌 듯 또 시끄러울 건 자명하다.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선 불문가지다. 추론컨대 그 상황에서 내년 4월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2018년 최저임금 심의를 끝낸 뒤 전반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개선책을 논의하겠다.” 늘 해 온 변명이기에 유추하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이른 겨울잠을 청한 상황에서 야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선 최저임금 관련 법안을 쏟아내며 불판을 달구고 있다. 노동계도 가세했다. 내년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정지작업이 벌써 시작된 셈이다. 물론 시간당 1만원으로의 인상을 향한 진군이다. 선진국처럼 업종별·지역별로 차등화하거나 근로장려세제를 결합해 실질적으로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리려는 방안과 같은 제도 개선은 애초에 관심 밖이다. 잠자는 최저임금위원회를 깨울 생각이 없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노동계 인사로 구성된 근로자 위원 9명은 모두 사퇴했다. 최저임금위원회에 대한 존재가치 부정이다. 공익위원 중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윤희숙 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도 사퇴했다. “최저임금위원회에 아집·정치만 남았다”고 일갈하면서다.

한데 이에 대한 최저임금위원회의 반응이 기가 차다. “해마다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는 진단에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토론 문화와 의지의 문제”라고 했다. 윤 연구부장의 사퇴에 대해선 “올해 처음 공익위원으로 위촉돼 노사가 치열하게 공방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이기도 한 그에게 “뭘 몰라서 사퇴했다”는 식으로 돌려줬다. 은둔 기관으로서의 해명으론 딱 어울릴지 모르지만 국가기관으로서의 비전과 책임감은 엿보기 힘들다.

최저임금은 소득 주도 성장이란 논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임금이 오르면 소비도 는다는 논리다. 최저임금 1만원이란 프레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야가 앞다퉈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내걸면서 절대가치화하는 형국이다. 차기 대선 때 각 캠프가 주요 쟁점으로 삼으리란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최저임금 문제는 어느새 폭염만큼이나 달궈질 대로 달궈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인 최저임금위원회는 트롤(Troll·스칸디나비아의 도깨비) 전략으로 대응하니 갑갑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햇빛에 노출되면 돌로 변하기라도 하듯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가 딱 그렇다. 등장만 하면 혼돈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똑같다.

최저임금이 정치 문제가 아니란 건 최저임금위원회가 더 잘 안다. 박준성 위원장도 “경제·경영학으로 봐야 한다”고 했던 터다. 임금 교섭하듯 치고받는 현 시스템의 문제를 모를 리 없다. 업종별 차등화, 산입 범위 조정, 세제와의 연결장치 마련과 같은 제도 개선 논의도 시급하다.

그런데도 잠만 청하는 건 최저임금의 정치화에 맞장구를 치는 것밖에 안 된다. 겨울잠을 자기엔 불판이 너무 뜨겁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이 판을 바꿀 호기다. 최저임금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없어서다. 소상공인이나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에게 덤터기 씌우는 비겁한 조직이란 오명을 벗고, 민생 경제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다. 그 옛날 공포와 해로움의 상징이던 트롤이 지금은 관광상품 캐릭터로 친근한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