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위에 에어컨 참으라니…노후 아파트 주민 분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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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 단지. 이날 낮 최고기온이 섭씨 34도를 육박하는 가운데 오후 3시 “전기 사용량이 급증하니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안내 방송은 오후 9시에 한 번 더 이어졌다. 주민 김모(59)씨는 “8월 첫째 주는 대형 공장도 다 쉬는 주간인데 왜 전력량이 부족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90년대 변압기 탓 집단정전 우려
전자제품 많아져 용량 감당 못해
2000만원 넘는 비용에 교체 꺼려

이날 한국전력거래소의 전력수급실적 통계에 따르면 예비율은 13.5%로, 한 자릿수로 떨어졌던 지난달 26일(9.6%)에 비해 개선됐다. 8월 첫째 주는 자동차·조선 업체들이 휴가에 돌입하기 때문에 전력이 남아돈다. 지난 2일 전력 예비율은 30.7%로 올여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왜 전력량이 부족하다고 비상을 거는 걸까.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전기 사용량이 급격히 늘었는데 오래된 변압기가 전기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다 보니 주민들에게 피크 타임 때 에어컨을 틀지 말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1993년 준공돼 8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한 중고 변압기 거래업체 관계자는 “1000가구 기준으로 용량이 큰 새로운 변압기를 구입하려면 2000만원 정도 드는 데다 공사비까지 부담해야 해 관리사무소에서 주민들에게 돈을 내라고 얘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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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압기는 한국전력공사에서 공급하는 2만2900볼트 고압 전기를 220볼트 저압으로 낮추는 장치다. 보통 단독주택 단지에는 전봇대에, 아파트 단지에는 지하에 설치돼 있다. 설계보다 전기 사용량이 많아지면 과부하가 걸려 고장 날 수 있다.

한국전기안전공사에 따르면 정전의 원인으로는 차단기 작동 오류, 케이블 화재 등도 있으나 전력 사용량 급증에 따른 변압기 과부하 고장이 훨씬 많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기도 일산·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당시 지어진 아파트의 경우 가구당 적정 전기 사용량을 시간당 1㎾로 보고 이에 맞는 변압기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후 전기 사용량이 늘면서 이 정도 용량의 변압기로는 대량 전기 사용을 감당할 수 없다.

임종민 전기안전공사 재해관리부장은 “최근에는 가구당 적정 전기 사용량을 3㎾로 잡아 변압기를 설치한다”며 “오래된 아파트에 설치된 변압기는 대부분 용량이 작아 사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폭염이 이어지는 올해 정전 사고가 늘어나는 이유다.

지난 4일 경기도 고양시 아파트 단지에서는 세 건의 정전 사고가 일어났다. 화정동 아파트(1500가구)와 행신동 아파트(1800가구)에서 오후 10시쯤 정전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각 400가구가 있는 원흥동 아파트 단지에서도 전기 공급이 끊겨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이처럼 변압기 정전 사고가 잇따르는데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가스 시설과 달리 변압기와 관련한 안전 관련법이 없어서다. 아파트 내 가스는 고압가스 안전관리법에 따라 검침과 사고 보고가 의무화됐지만 변압기는 관련법이 없어 사고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임종민 부장은 “20년 이상 노후화된 변압기는 시설 보강을 하더라도 한계가 있어 교체가 필요하다”며 “주민들도 아파트 외벽 페인트칠보다는 내부 전기 시설을 교체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상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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