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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와 함께 남북 ‘거시평화계획’ 내놨더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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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호 26면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한반도 배치와 관련해 여러 논의와 논란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를 더 한다고 하여, 그것이 합의를 끌어내는 데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 지면을 빌려 필자가 해보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관점과 선택들을 하나의 공간에 모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합리적 해결을 위한 논의를 준비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은 쉽게 피아(彼我) 간의 사생결단의 공방이 된다. 그 아래에는 대체로 사실에 대한 합리적 고찰보다 이념적 확신이 작용한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우리의 담론의 풍토가 아닌가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핵·미사일 개발과 실험이 보여 주는바, 호전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북한의 정책은 정부 당국자나 정계 그리고 국민 일반에게 우려와 논쟁의 주제를 주고 풀기 어려운 현실적 과제를 안겨줬다.


대처할 방안들을 간단히 추상적으로 간추려보면,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남쪽의 군사력 과시로 북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존재를 의식하게 해 그 호전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군사적 조처를 삼가고 평화적 순화나 순응의 의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평화라고 할 때, 어느 쪽의 대책을 선택하든지 간에, 평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군비강화가 평화 수호를 위한 외곽을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동시에 전쟁 분위기를 북돋우고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단의 대항적 반응을 삼가는 일이 상대방의 적대 행위를 완화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민족적 단일성에 대한 의식을 버릴 수 없는 남북관계에서 하나의 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정책이 반드시 평화 가져오지는 않아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여, 평화정책이 반드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자주 지적되는 사실이다. 2차 대전의 경과를 논하는 글들을 보면, 1938년의 뮌헨협약을 비롯하여 영국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주동이 돼 추진한 유화정책이 히틀러로 하여금 전쟁을 유발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설이 있다. 화전(和戰) 어느 쪽을 택하든 확실한 보장은 없는 것이 그러한 위기상황의 선택이다. 정치적 선택의 많은 것이 그러하고, 정치의 정열과 책임은 이러한 불확실성에서 온다.


양자택일이 요구되는 국제 관계에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은 화전 모순의 양자(兩者)를 다 택하는 것이라 할지 모른다. 평화가 목표라고 해도, 그 목표의 추구에 군사력은 흔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된다. 다만 모순의 양자를 추구하고 그 중에 군사력의 강화 또는 현시가 필요하더라도 평화가 목표라면, 다른 선택, 평화의 존재와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는 있다고 할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진정한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반드시 국제관계라고 할 수는 없는 남북 간의 대결에서 더욱 그러하다.


최근 사드 배치의 결정이 있을 수 있는 선택의 하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그리고 참으로 바라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것이 남북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의 계속되는 핵과 미사일 개발 그리고 전쟁 위협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인 그것을 일방적인 적대화의 표현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그것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의 주된 동기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남북관계의 군사적 균형을 위한 결정의 부차적 효과이지 그러한 결정의 근본적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드 배치가 한·중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전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부차적인 효과이지 의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을 중국이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만큼, 조정하고 협의하고 합의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사드가 공격 무기가 아니고 방어를 위한 시설이고 또 그 방어 범위도 제한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협의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심각하게 대하여야 할 문제는 사드 설치 지역 주민의 불안이다. 이것이 설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핵심이 되는 것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실 전달과 나라 전체의 필요에 관한 설득의 노력이다.


되풀이하건대, 이번 사드 문제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적대적으로 보일 수 있는 조처에 덧붙여 평화가 정부의 의도란 것을 명시하거나 또는 홍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실한 것은 평화의 의도를 천명하는 일이다. 평화는 북에도 민족의 이름으로 호소할 수 있는 목적이고 가치이다.


 평화가 정부의 의지라는 점 강조했어야사드 배치를 뒷받침하는 평화의 의지와 함께, 넓게 또 진심으로 분명히 할 것은 평화가 남북관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구체적인 제안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번에도 사드 조처와 함께 어떤 구체적인 평화 프로그램을 내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공표하여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 설정을 다짐하여야 한다. 경제를 논하는 데에 경제 전체를 다루는 거시경제학이라는 것이 있고, 부분적인 문제를 다루는 미시경제학이라는 것이 있다. 근년에는 시각을 더 확대하여 경제의 여러 연관 관계를 인간의 삶의 넓은 영역 속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거시생태환경경제학이라는 것도 등장하고 있다. 이에 비슷하게 남북관계를 크게 그리고 면밀하게 다루는 거시평화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모든 미시적인 정책은 그 큰 구도 안에서 움직이고 또 그것에 의하여 정당화되면 좋을 것이다. 물론 시의(時宜)에 맞는 수정도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이것은 북의 입장도 널리 참조하는 넓은 폭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사드와 관련하여 매체들에 게재된 여러 논의 가운데, 중양일보에 실린 이홍구 전 총리의 칼럼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남북 화해의 방향을 가장 적절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일보 7월 23일자) 이것은 소련을 비롯하여 공산진영이 해체·붕괴한 후, 남과 북이 근접하게 되고 거의 현실적이고 공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 경위를 회고하는 글이다. 이 합의는 1994년 7월 25일에 있을 예정이었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으로 그 종착점에 이르게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죽음이 이 기대를 깨트리고 말았다. 이 합의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해체 이후, 여러 차례의 남북 접촉으로 준비됐다. 남북 간의 합의서 작성, 비핵화공동선언, 유엔 동시가입 등이 최종 합의로 나아가는 준비가 되었다. 이 전 총리의 의견으로는 남북의 평화 관계가 공식화되지 못한 것은 남북정상회담이 불발하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북과 미국 사이에 공식적 외교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적절한 국제적 인정을 현실이 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남측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득의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탓도 있다고 한다.


 북의 주된 관심은 체제적 정체성 인정그런데 남북의 평화적 관계를 공식화하는 데 북의 주된 관심은 자신들의 체제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으로 보인다. 이홍구 전 총리의 칼럼이 들고 있는 사례들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도 이점이다. 사실 그 이후에 대두된 북의 선군정책도 독립적 정치 단위로서의 자신들의 존재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합의가 되는 89년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밝히고 있는 것도 남북 두 체제의 공존이다. 남북을 통틀어 분단을 항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 이전에 각각의 체제의 독자성을 잠정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실이라 할 것이다. 통일에 선행하여 평화가 있고, 상호 인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협의에 전제로도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1994년에 확인될 뻔 했던 남북의 공식 관계가 다시 재출발하고 진전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전 총리는 위 칼럼에서 그때에 무산된 합의를 두고 아쉬움을 표현하기보다는 거기에서 지혜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의 재현에 별 기대를 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다차원적 교섭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는 것이 정치이다. 그리하여 착잡한 여러 관계에서 의외의 통로로 이루어지는 교섭과 합의를 보는 경우가 없지않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해결의 통로에 대한 모색과 함께, 거시평화계획이 궁리하여야 하는 것은 정치 이외의 여러 소통의 방법들이다. 거기에는 문화·체육·관광·학문·소식·정보·인물의 교환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환이 반드시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정치의 경우와는 달리, 삶의 여러 분야에서 작은 것들의 누적은 보다 지속적인 연결망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큰 흐름의 전환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그중에도 경제는, 정치에 이어져 있으면서 정치에서 분리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삶의 영역이다. 작년 네이버의 열린 연단 강연 시리즈에는 서울대의 김호동 교수의 이슬람 문명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오늘날의 이슬람이 보여주는 폭력적 성격이 어떻게 완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능우 교수의 답은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이 나아지면, 신앙의 독단적 성격과 폭력이 완화되는 효과가 생기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 또 집단적 동원을 강조하는 정치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력보다는 현실적 힘이 약한 여러 작은 인간 활동의 교환도, 누적적으로는 그러한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통일·평화 위해선 보다 넓은 시각과 관심 필요지금 말한 것들은 물론 현실과의 관련을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함이 없이 내놓은 아이디어들이다. 그러나 통일 또는 평화적 공존을 위한 정책 개발은 이러한 것들을 보다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것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넓은 그리고 초연한 시각과 관심이 필요하다.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여러 국제 관계에서도 오로지 이해(利害)와 힘의 역학관계의 틀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오늘의 사고 관행이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의 전술적 계산이 삶의 지혜가 된다. 이러한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상황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계획도 연구되어 마땅하다. 그것은 목전의 전술로부터 어느 정도는 초연할 수 있는 조감(鳥瞰)의 능력을 요구하고 그 기초에 합리적 이성 그리고 윤리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의 깊은 심성에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전략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이 틀 안에서 연구돼야 한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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