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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뿌리는「신한청년당」"|서울대 신용하 교수 연구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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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다시 3·1절을 맞았다. 1919년 3·1운동의 최초의 움직임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신용하 교수(서울대)는 최근 이 문제를 추적, 연구중이다. 신교수는 3·1운동을 기획한 진원지는 중국 상해이며 그 주체는 신한청년당이라고 보고 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조용은·한광교·조동호등이 상해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다.
1918년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즉각 대통령 특사「크레인」을 중국에 파견, 전후의 평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케 했다.「크레인」이 상해에 도착하자 중국측은 환영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한국인으로서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이 참석했다.「크레인」은 여기서 파리평화회의에선 전후 식민지문제가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의해 피압박민족의 의사가 존중돼 처리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여운형은 이 연설을 듣고 이번에 열릴 파리평화회의에는 한국대표가 참석, 한국민족의 독립의사를 발표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파리회의의 중국대표단의 일원인 왕정정에 부탁,「크레인」을 면담하고 파리회의에 한국민족대표가 참석할수 있도록 요청했다. 「크레인」은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여운형은 천율에 있던 김규식을 급히 상해로 부르는 한편 신한청년당 회의를 열어 새로운 정세변동에 대한 대응방법을 논의했다. 이들은 11월하순 신한청년당 이름으로 파리평화회의의 열국대표와 미국대표에게 보내는「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2통을 작성,「크레인」특사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고 다시 동일한 2통을 파리회의 중국대표단 고문으로 파리로 가는 상해 밀라드 리뷰지 사장「밀라드」에게 의뢰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회의에 파견할 한국민족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했다.
한편 1918년 11월하순 국내에 1차로 선우혁·김철등을 파견,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과 파리회의에 파견하는 민족대표의 자금을 지원해줄것을 요청했다.
일본 유학생에겐 조용은과 이어 장덕수가 파견됐으며 여운형은 간도와 노령 연해주로 가 박은식·방창범·이동휘·이동령·조완구등과 만나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약속받았다.
국내에 들어온 선우혁은 선천의 목사 양전백, 정주의 장로 이승훈, 평양의 원로목사 길선주와 신민회때의 동지들을 만나 적극적인 찬동을 얻고 서울을 거쳐 상해로 돌아갔다. 평양에선 선우혁의 권유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 3월3일 고종의 국장당일에 결행키로 했으나 서울의 천도교측에서 이승만에게 연합전선을 펴자는 교섭이 옴으로써 계획을 변경했다.
김철은 서울에 들어와 천도교측을 만나 3만원의 지원을 약속받고 상해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떠나는 장덕수의 임무는 이랬다.
『…우리당의 활동내용은 당략상 그 상세함을 귀하에게 명언할 수는 없으나 각지에서 우리동포는 독립을 선언하고 운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연이나 일본관헌은 반드시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보도하는 것을 금할 것은 명약관화하므로 귀하는 일본인을 가장하고 동경 및 경성으로 들어가 운동정황을 상해「중화신보」기자인 조동호에게 통신하기 바라다.
또 동경에는 조용은을 파견하였으므로 도착후에는 와세다대학 대기실을 수신지로 통신하고 상세하게 상의하라. 또 동경의 운동은 2월초순, 경성의 운동은 3월 초순에 실행될 예정이므로 동경의 상황을 통신한 후에는 곧 경성으로 들어가 그곳 상황을 통신하도록 하라. 그리고 귀하가 만일 일본관헌에 체포되더라도 당의 행동 및 나의 이름은 절대로 비밀을 엄수하라.』
말하자면 일제의 보도통제에 대비한 작전이었다.
장덕수는 중국인 유학생 유모로 가장하고 2월초 동경에 도착, 먼저온 조용은을 만났다. 조용은은 이미 일본유학생들과 접촉, 2월8일 거사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러줬다. 임무를 마친 조용은은 동경이 위험하다고 판단, 상해로 떠났고 장덕수는 서울로 잠입했으며 당원 이광수는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문을 작성코자 상해로부터 동경으로 스며들었다.
이에앞서 2월1일 파리평화회의 한국민족대표 김규식은 선편으로 상해를 출발했다. 여운형은 중국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선편을 마련했으며 여비는 국내외 동포들이 모금한 것이었다. 김규식의 출발은 3·1운동 발발에 중대한 의미를 던졌다. 이 사실은 본국과 일본유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통보됐으며 그후 운동의 급속한 추진에 하나의 구심점이 됐다.
신교수는『신한청년당의 활동은 3·1운동을 가장 먼저 준비하고 국내와 연결을 맺은 움직임으로 일제관헌도 가장 중요시한 흐름이었으나 지금까지 사실과 다르게 경시돼왔다』고 말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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