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스웨덴수상 「올로프·팔메」 의 암살은 뜻밖이다. 최고의 복지국에, 안정된 사회에서 이게 무슨 변인가.
경호원 한명도 없이 부인과 단둘이 영화구경을 하고 돌아오다 이 같은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 바로 그 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북구의 케네디」로 불렸던 「팔메」는 사회민주주의의 신장과 복지를 추구한 점에서 곧잘 남구 (스페인) 의 「곤살레스」 수상과 비견되기도 했다.
「팔메」 는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온건한 사회주의로 이끌어 스웨덴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가장 걱정 없는 사람」 이라고 해왔다.
1927년 태생인 그는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한 다음 미국 오하이오주의 캐년대학에 1년간 유학까지 했다. 그러나 귀국하기전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흑인 슬럼가, 푸에르토리코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그 「풍요속의 빈곤」에 크게 쇼크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때의 체험이 그를 「복지」에 눈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웅변과 문장, 그리고 조직력에 뛰어났던 그는 52년「에르란델」전 수상이 이끄는 사회민주당에 입당, 63년 무임소상으로 처음 입각했고 계속해서 운수통신상, 교육상을 역임했다.
이때 그는 비록 옷은 벗지 않았지만 『나는 호기심이 많아요』라는 섹스영화에 출연, 화제가 되기도 했다.
69년10월 「에르란델」 의 바통을 이어받아 대망의 당수 자리와 수상 자리를 한꺼번에 차지했다. 그때가 42세. 스웨덴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최연소 수상이었다.
그는 특히 학생과 노동자층에 인기가 높았다.
그는 또 열렬한 반전주의자였다. 68년 봄 교육상시절 스톡홀름에서 월남전 반대데모가 번지자 당시 월맹대사의 팔을 불잡고 데모대의 선두에 나섰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는 수상이 된 다음에도 미국의 월남전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월맹에 경제원조를 하여 한때미국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적도 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미국의 월남전 탈주범, 징병 기피자들의 피난처였었다.
『중립이라고 해서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다』 고 전제하면서 베를린장벽, 월남전, 남아의 인종차별주의를 서슴없이 규탄한 그는 76년까지 수상으로 봉직하다 76년부터 82년까지 야당으로 있었다.
민권과 복지를 위해 노력해온 한 정치가의 죽음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빈곤」을 본다. 정신적인 빈곤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