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독재 끝났다"…환호…또 환호…|민주 필리핀 태어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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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닐라=박병석 특파원】「마르코스」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25일 밤 3백만이 넘는 마닐라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춤추고 노래하고 폭죽을 터뜨리면서 승리의 환호를 올렸다.
거리의 모든 자동차들도 경적을 울려댔고 모든 성당의 종들도 승리의 복음을 전파하느라 밤새 울렸다.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마다 시민들이 함께 뛰어올라『이제는 해방이다. 오늘은 해방된 날』이라고 외치며 필리핀 국기를 흔들었다.
또 일부 시민들은 정부군의 진입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에 사용했던 자동차 타이어들에 불을 질러 굴리며『코리! 코리!』를 외쳐 대기도 했다.
대통령궁으로 몰려든 일부 시민들은「마르코스」에 마지막 충성을 다하고 있는 군인들에게도『우리의 형제들이며 곧 투항할 것이니 그들을 해치지 말자』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기도 했다.
이날 밤「마르코스」의 망명 소식은 10시40분 다른 TV방송들이 모두 방송을 중단한 가운데 국영방송인 채널4의 임시뉴스를 통해 보도됐다.
「코라손」대통령에 대한 시국좌담회가 한창 진행중인 가운데 갑자기 메모지를 든 여자아나운서가 등장, 떨리는 목소리로「기쁨의 뉴스」를 전하겠다며『「마르코스」가 이미 이 나라를 떠났다』고 망명소식을 알렸다.
이 아나운서는 로이터통신을 인용, 「마르코스」가 미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이 나라를 떠났으며 이와 동시에 말라카냥궁을 지키던 군인 1천 여명도 함께 떠났다고 말했다.
25일 하오10시40분(한국시간 1l시40분) TV 필리피노(채널4) 긴급뉴스.
『우리는 이겼습니다. 「마르코스」는 떠났습니다. 국민은 승리했습니다.
국민여러분 만세. 뉴(신)필리핀 만세. 만세를 부릅시다. 승리의 춤을 춥시다.』
「마르코스」의 국외탈출이라는 긴급뉴스를 방송하던 여자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같이 사회를 보던 앵커맨이 마이크를 잡았다.
『국민 여러분 기도합시다. 「마르코스」전 대통령과「이멜다」여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지금 막 조국 필리핀을 떠난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비록「마르코스」와「이멜다」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같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시다.
천주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두 사회자는 물론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마르코스」대통령 가족들이 대통령궁을 떠난 직후 최초로 궁에 들어간 로이터통신 특파원은 화려한 대통령 식탁에서 반도 채 먹다만 음식이 남아있는 것이 발견돼 마치 유령들의 잔치처럼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고 전했다.
궁 안에는 또 옷가지들이 사방에 흩어져있어 대통령 가족과 그의 보좌관들이 황급히 대통령궁을 떠났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르코스」의 집무실은 책상 위에 놓여진 몇 장의 문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르코스」의 침실은 범약해진 몸을 지탱시켜주는 대형 산소통 하나와 침대 머리맡에 전투모가 그의 건강과 집권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 침실에서 발견된 비디오 테이프에는 『「히틀러」, 그의 생애』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라모스」신임 참모총장은 25일방 질서회복을 위한 조치로서 시민들에 의한「마르코스」측근 인물들의 재산탈취와 이들에 대한 폭행 등을 막도록 군에 명령했다.
「라모스」참모총장이 취임 후 첫번째 내린 이 명령은『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신속한 국민적 화합을 이룩하기 위해』특히 정부기관·건물 및 정부관리들의 가택에 대한 약탈행위를 금지하도록 하는 한편, 어떤 이유로도 폭행을 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마르코스」대통령의 사임소식이 전해지자 5천 여명의 시민들은 20여명의 경비병을 밀어 제치고 화려한 장식의 강철로 된 말라카냥궁전 문안으로 몰려들어가 20년 동안 이 나라를 억압해온 독재자의 사진을 떼어내 부숴 버렸다.
스페인풍의 사치스런 거실에는「마르코스」의 가족들이 서두른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우아한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이 남아 있었고「마르코스」의 서재에는 메모지에『내가 문을 들어설 때「우리는 자유다」라는 외침 소리를 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또 한 노트에는『소름이 끼치게 조용하고 나는 혼자였다. 정적은 갑자기 들어온 심부름 소년에 의해 깨어졌고 그 소년은 나에게 초컬릿 하나를 권했다』고 써 놓았다.
「마르코스」가 써놓은 쪽지 중에는 24일「스피크스」백악관 대변인이 발표한 성명문을 복사한 것이 놓여 있었으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밑줄이 쳐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유혈사태를 가져올 무력을 그들이 사태해결에 사용하려 한다는 보고가 있다』또 다른 쪽지에는『사람들은 대통령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라디오 베리타스가 방송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1지구부터 12지구에 배치된 전우들이 이미「엔릴레」와「라모스」에게 지지를 약속했다.』
「마르코스」가 반정군측과 항복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은「마르코스」의 측근인「파투갈란」장군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마닐라의 한 방송은「마르코스」와「엔릴레」국방상간에 항복조건에 관한 밀담이 오가고 있다고 보도한 직후 대통령궁 경호대 소속「산티아고」중령의 말을 인용, 「파투갈란」장군이 협상사실에 관한 메시지를 경호대 소속 고위 장교들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1천명에 달하는 해병대 경호부대가 25일 밤 행진대형으로 대통령궁을 빠져 나와 빌라 모르기지로 향했다. 해병지휘관「포르투노」대령은 대통령궁 맞은편에 있는 기지로 철수하면서『전쟁은 끝났다』고 말했다.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던 장갑차 3대와 육군 2백명도 함께 철수했다. 이들 군인들은 자신들에게 꽃을 건네주는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해병대는 그 동안 대통령궁 경호를 끝까지 맡으면서「마르코스」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4면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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