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승리…비정국에 암운|필리핀 현지정세-대미관계를 분석하는 긴급좌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격렬한 대통령선거전을 치르고 난 필리핀은 요즘 여야간의 대립이 더욱 격심해지고 경제재건 문제 등 갖가지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다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새로운 위기감마저 자아내고 있는 필리핀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대미관계 및 선거이후의 정국추이를 진단해 보기 위해 김건진 외신부장과 일시 귀국중인 장두성 워싱턴 특파원, 그리고 23일간 현지취재를 다녀온 홍성호 사회부차장의 긴급 좌담을 마련했다.
▲아무래도 필리핀은 앞으로 상당한 「격동의 시대」를 맞을 것 같습니다. 현직 「마르코스」대통령의 승리로 선거전은 일단 막을 내렸지만 필리핀은 벌써부터 갖가지 선거후유증과 쌓여온 문제점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코라손」여사가 이끄는 야당측은 「부정선거」시비를 내걸며 반「마르코스」행동을 펼 것이 뻔하고, 미국도 「개혁에의 압력」을 일층 강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난파 직전에 있는 필리핀경제를 소생시키는 문제, 급속도로 신장하고 있는 공산게릴라대책, 선거공약이었던 정부 및 군 개편문제, 그리고 「마르코스」의 건강문제 등은 여전히 필리핀이 안고있는 불안요인 들이지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에 「마르코스」가 네번째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집권 4기를 맞는 「마르코스」정권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얘기가 되겠지요.
▲이번 선거 때 가장 흥미로왔던 일은 미국측의 태도 변화였습니다. 미국은 72년 계엄령 선포 이후 줄곧 「마르코스」정권을 비난해왔고 83년「아키노」피살사건 직후에는「레이건」 대통령이 방비계획을 취소하는 사대에까지 이르렀지 않습니까. 또 투표 전까지만 해도 「레이건」대통령은 자유·공정선거를 강조하기 위해 원조라는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여야가 협력하여 정부를 활성화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백악관의 선거 후 첫 성명-「리처드·루거」상원외교위원장의 선거부정에 대한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은 의외였습니다.
▲이 같은 미국의 태도가 「코라손」측을 크게 낙담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필리핀의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지원할 것으로 믿었던 미국이 「선거는 필리핀국민들의 일」이라며 개표결과를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데 대해 야당측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이라면 무엇보다도 군사적 이익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이래 소련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군사력강화를 꾸준히 진행시켜 왔습니다. 육상으로는 중소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50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의 존재가 버티고 있고, 해상으로는 소련극동함대가 베트남의 캄란 기지와 연결해 서태평양으로부터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미7함대의 작전해역에 도전하고 있어요.
이와 같은 소련의 군사력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필리핀에 위치하고 있는 수비크만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는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 요충입니다. 소련함대의 길목을 지키고 유사시에 목을 조를 수 있는 위치지요. 필리핀의 내정에 관한 미국의 관심은 바로 이 두 기지를 외협 받아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명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미 국방성 쪽에서는 필리핀 기지를 옮겨 갈 후보지를 검토중이란 이야기를 흘려 보냈었지만 그건 「마르코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한 하나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게 분명합니다.
▲「레이건」행정부는 늘 외교정책면에서 통일된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필리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외교의 주무부서는 의회·국무성·국방성·중앙정보국(CIA)·백악관 등인데 이번 선거실시의 계기가 된 「랙설트」상원의원의 「마르코스」면담 때만 해도 의회와 국무성쪽에서는 「마르코스」의 퇴진을 목표로 삼은 듯한 인상이 강했습니다. 「마르코스」의중병설이 나오고 의회쪽에서는 「마르코스」일가 미국의 원조를 빼돌려 미국 내에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다는 혐의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어요.
게다가 관변 소식통들은 「마르코스」가 개혁 없이 그대로 통치를 계속할 경우 3∼4년 안에 신인민군(NPA)의 손으로 정권이 넘어갈 것이라는 엄청난 이야기를 흘려 보냈습니다.
「월포위츠」동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는 의회 증언에서 만약 선거를 실시할 경우 「마르코스」가 승리해 오히려 그의 계속 통치를 합법화시키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마치 그런 결과를 우려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어요.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레이건」대통령은 「마르코스」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은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필리핀의 민주화보다는 기지를 보호하는데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비난을 필리핀 인들로부터 받게된 것입니다.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고민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있는 「마르코스」정권을 미국이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임에도 불구하고 단기적 현실판단으로는「마르코스」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데 있습니다.「레이건」의 발언은 계산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야세력을 지지하는 정책을 쓰면서 가끔 「마르코스」의 입장도 두둔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시간을 번다」는 것은 외교정책으로선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건 주요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제2의 이란사태」를 겪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필리핀 정치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도 미국 내에서는 일고있는 듯 합니다.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미국은 더욱 더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밖에 갈 도리가 없어졌습니다. 조기선거 유도로부터 「하비브」특사 파견으로까지 발전한 미국의 간섭은, 지금 와서 중단할 경우 미국이「마르코스」의 들러리를 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은 이제 「마르코스」가 「코라손」세력을 포용해 거대한 내정개혁을 하도록 설득해야 되는데 그 두 가지가 모두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데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야당측은 「마르코스」가 부정선거를 통해 재선되는 경우 범국민적인 시위를 일으켜 대결을 계속하겠다고 개표 전부터 다짐해왔고 그 움직임은 당선확정 발표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격대상이 「마르코스」에 그치지 않고 그를 지원한 미국까지 포함시켜 「독재자와 야합한 미국」이라고 반미 감정을 부추기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이나 「마르코스」쪽에서는 이 같은 시위가 「아키노」 피살사건 때처럼 얼마 안가 수그러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와는 시위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키논」사건 때와는 달리 군중이 야당의 기반을 통해 조직적으로 동원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가톨릭까기 가세하여 비폭력·불복종투쟁 형식을 갖춤으로써 장기화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야당일각에서는 납세거부와 일시, 또는 망명정부설립 주장을 하는 측도 있습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바로 이런 정국혼란을 틈타 소련이 미국의 아성이었던 필리핀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넘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CPP (필리핀공산당)나 NPA (신인민군) 등 반정부 세력들이 지금까지는 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부군과의 정면대결을 꿈꾸고 있는 이들이 공산종주국에 제휴의 손길을 뻗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거후유증은 집권KBL(신사회운동당) 내부나 그 주변에서도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만은 이번 선거의 정확한 개표결과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대규모 개편이 불가피 하리라고 봅니다. 또한 「마르코스」가 6년 후의 재집권을 또다시 하기 어렵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할 때 후계자문제를 둘러싼 주변의 암투가 이번 집권기간 중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베르」군 참모총장의 사임으로 군 내부의 변화도 멀지 않아 닥쳐올 것입니다. 권한대행을 다시 맡은 「라모스」중장이 실권을 장악하기까지는 군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던 「베르」파의 반발이 예상되고 수년 전부터 태동되어온 군부개혁파 청년장교세력들의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 지리라고 봅니다.
▲필리핀이 이번 선거를 계기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리라는 예상에는 동감입니다. 여야간의 대립에서 오는 진통, 각 세력내부의 문제, 국민여론의 분열, 쓰러져가는 경제 등으로 이루어진 혼란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치유책도 강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역할은 그 비중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요.
▲아시아지역에서 오랜 외교 경험을 갖고있고 중동사태 때 「레이건」대통령 특사로 활약했던「필립·하비븐」(66)가 이번에도 마닐라에 파견됐습니다. 그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마르코스」와 「코라손」의 정면 충돌을 막는데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필리핀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미국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또 선거 후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후유증을 어떻게 큰 혼란 없이 극복할 수 있도록 필리핀을 돕느냐 하는 과제에 대해 「레이건」대통령이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봅니다.
참석자
장두성(워싱턴 특파원) 김건진(외신부장) 홍성호(사회부 차장 마닐라 특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