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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촌티 나는 ‘못난이’ 신발로 파리 명품과 맞대결, 그게 성공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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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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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의 미겔 플룩사 최고경영자(CEO)는 “브랜드를 늘 새롭게 보이도록 ‘업데이트’하는 것이 CEO로서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다. 캠퍼 브랜드와 플룩사 CEO는 태어난 지 41년 된 동갑내기다. [사진 신인섭 기자]

“우리가 신발 회사인지, 패션 잡지인지, 광고회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급변하는 디지털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겠지요.”

스페인 신발 브랜드 ‘캠퍼’ CEO 플룩사

스페인 프리미엄 캐주얼 슈즈 브랜드 ‘캠퍼’의 젊은 최고경영자(CEO) 미겔 플룩사(41)의 말이다. 그는 캠퍼와 동갑내기다. 아버지 로렌조 플룩사(69)가 캠퍼를 설립한 1975년에 태어났다. 플룩사 집안은 캠퍼 이전부터 신발 사업을 시작해 벌써 4대째 이어오고 있다. 미구엘의 증조부가 1877년 고향인 지중해 마요르카 섬에 신발 공장을 차린 게 출발이다.

캠퍼는 좋은 가죽으로 만든 독특한 디자인과 편안함으로 입지를 다졌다. 마요르카 방언으로 ‘농부’라는 뜻의 캠퍼는 투박한 듯하지만 멋스러운 디자인이 특징이다. 최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캠퍼 국제 디자인 워크숍’에 참석차 방한한 플룩사 CEO를 만났다. 그는 “선대가 일궈 놓은 전통 산업을 디지털 시대에도 번성하도록 만드는 게 가족 기업을 이끄는 4대 경영인으로서의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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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 열린 ‘캠퍼 국제 디자인 워크숍’ 출품작. ① 파비앙 브레트 ② 박현재 ③ 이인규 ④ 정이녹 ⑤ 폴리나 크리치코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신발 디자인을 선보였다. [사진 캠퍼]

한국은 캠퍼에 어떤 시장인가.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중요한 시장이다. 미국(15%)보다는 작지만 일본과 비슷한 규모다. 한국 고객들이 창의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은 세계 70개국에 진출해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오랜 기간 국내 브랜드에 머물다 1986년 스페인의 유럽연합(EU) 가입,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후에야 해외 진출을 꿈꿨다. 92년 파리·런던·밀라노에 처음으로 해외 매장을 냈다.”
반응은 어땠나.
“완전 재앙 수준이었다. 팔리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성공한 브랜드였지만 해외에선 무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스페인에서 버는 돈을 몽땅 해외에 투자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꼭 해외 진출을 해야 하느냐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어떻게 버텼나.
“자신을 믿고 캠퍼의 브랜드 정체성을 꾸준히 알렸다. 당시 일부 스페인 브랜드들은 해외 진출 시 프랑스·이탈리아·영국 브랜드로 위장하기도 했다. 우리는 반대로 스페인, 특히 시골 마요르카 출신 티를 확 냈다. 모험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옳은 결정이었다. 파리로 관광 온 일본인들이 캠퍼의 독창적인 디자인에 관심을 보였다. 95년 일본에 진출했고, 스페인 밖에서 첫 성공을 거뒀다. 일본인들이 유럽에 와서 자꾸 캠퍼를 찾으니까 유럽인들도 캠퍼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글로벌 성공을 꿈꾸는 기업에 조언을 하자면.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독창적인 상품,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과 독보적인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인내심도 중요하다. 최강자와 경쟁하겠다는 자세도 필요하다. 우리가 첫 진출지를 파리와 밀라노로 정한 것처럼 말이다. 성공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세상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운도 좋아야 한다.”
한국엔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토머스 에디슨을 인용하고 싶다. ‘더 열심히 할수록 더 많은 행운이 쌓인다.’ 행운은 노력과 함께 온다.”
캠퍼의 독창성은 어디에서 오나.
“조직 DNA에 각인돼 있다. 할아버지는 품질 좋은 신발을 만드는 재능과 노하우를 물려줬다. 아버지는 제품을 혁신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걸 보여줬다. 새로운 것을 찾는 문화가 조직에 전해졌다. 지중해라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마요르카는 예부터 화가·작가 등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곳이다. 일본·독일·체코·미국·중국·네덜란드·영국 출신으로 구성된 디자인팀의 문화적·에스닉 다양성도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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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디자인은 수명이 길다. 베스트셀러 ‘펠로타스’①②는 1995년 출시 이래 소재와 디테일을 변주해 왔다. 88년 출시한 ‘트윈스’③④는각기 다른 디자인을 한 쌍으로 신어 한 켤레를 완성하는 게 특징. [사진 캠퍼]

가업 승계자로서 책임과 과제는.
“플룩사 가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 제조 가족’이다. 4세대 경영인으로서 자부심이 크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무겁다. 사업을 온전하게 유지해 다음 세대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더구나 요즘은 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하고, 테러가 빈번해지는 등 비즈니스에 있어 어려운 시기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나 스스로 묻는다.”
복안이 있나.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 지난 50여 년간 휴머니티가 진전을 이뤘듯이 이번 워크숍 주제처럼 결국 ‘용감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전쟁·기아, 그리고 강도 높은 노동을 겪어 낸 조상들에 비하면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할아버지는 장기적인 비전과 신발 제조에 대한 열정, 글로벌화에 대한 꿈을 가르쳐 줬다. 아버지로부터는 모든 걸 배웠다. 혁신과 모험뿐 아니라 겸손한 태도, 좋은 파트너를 고르는 안목, 인재를 선별하는 법 등이다.”
요즘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
“캠퍼를 늘 새롭게 보이도록 ‘업데이트’하는 데 힘쓴다. 모던함이란 뭔가, 컨템퍼러리 브랜드란 어떤 것인가를 늘 고민한다. 다행히 창의성·상상력·유머 등 캠퍼가 30년 전부터 추구해 온 가치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이를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커뮤니케이션이나 판매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캠퍼의 디지털 전략은.
“디지털 세계는 고객과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이는 더 많은 콘텐트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다. 고객에 대한 세세한 정보 등 데이터베이스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수많은 정보 중에서 필요한 것을 뽑아내 개인 맞춤형 서비스에 활용하는 게 또 다른 과제다.”
디지털 시대에 브랜드 정체성은 달라졌는가.
“우리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브랜드다. 고객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고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둘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게 관건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콘텐트 생산이 중요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 패션 잡지와 비슷하게 됐다. 매주 또는 격주로 새로운 콘텐트를 올리고 홈페이지를 꾸미고 뉴스레터를 보내고 페이스북 소셜미디어용 콘텐트를 별도로 제작한다.”

캠퍼는 호텔(바르셀로나·베를린)과 레스토랑 사업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캠퍼 바르셀로나 호텔은 유명 여행사이트(트립어드바이저)에서 도시 내 700개 호텔 가운데 1위를 장기 석권하고 있다. 이 호텔의 아시아 퓨전 레스토랑은 미슐랭 1 스타를 받았다.

성공 비결은.
“고객의 입장에서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초점을 맞춘 것이 주효했다. 좋은 디자인의 객실, 편안한 침대, 24시간 오픈 무료 바를 뒀다. 음식을 방으로 가져갈 수도 있게 했다.”
신발과 무슨 관련이 있나.
“디자인 자원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싶었는데 가방·옷처럼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분야로의 확장은 싫었다. 탁월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콘셉트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신발)·식(레스토랑)·주(호텔)를 하나로 묶는 걸로 콘셉트를 잡았다. 자회사로 있는 여행사, 매장 건축·인테리어 사업과도 잘 들어맞았다.”
호텔 사업 확장 계획은.
“호텔 사업은 아주 매력적이다. 누구에게나 여행은 기분 좋은 일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가족에게 추억을 선사하는 일은 선행을 베푸는 것 같다.”

좋은 신발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는 말이 있다. 캠퍼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까.

[S BOX] 국제 디자인 워크숍 열어 젊은층과 소통, 새 비전 찾아

젊은 층과의 소통. 독창적이고 신선한 감각. 혁신과 모험. 패션 브랜드들이 늘 안고 있는 숙제다.

캠퍼가 주최하는 ‘국제 디자인 워크숍’은 이런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사다. 갓 실무를 시작한 신진 디자이너나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들과의 작업을 통해 캠퍼의 새로운 비전을 찾는다. 참가자들의 실험적인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젊은 층과 소통한다는 얘기다.

디자인 워크숍은 2009년 캠퍼 본사가 있는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시작됐다. 마요르카 이외 지역에서 디자인 워크숍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겔 플룩사 캠퍼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이 창의성, 디자인, 패션 분야에서 앞서 가는 핫 플레이스여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국내에서 5명, 해외에서 7명이 참가했다. 신발과 마스크를 소재로 디자인한 한국적 특색의 신발(박현재), 과감한 해체와 결합을 통해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을 제안한 신발(정이녹), 등산용 로프 등 이색적인 끈 소재를 디테일로 사용한 디자인(이인규) 등이 캠퍼의 디자인 전문가들로부터 호평받았다.

서울 곳곳에서 찾은 폐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안적 디자인으로 표현한 부츠와 운동화(폴리나 크리치코), PVC 로프로 매듭을 엮은 실험적인 샌들과 가방 손잡이를 신발 굽과 스트랩에 연결한 스포츠 샌들(파비앙 브레트) 등도 눈에 띄었다.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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