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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성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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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 하는 ‘이달의 책’ 8월의 키워드는 ‘성찰’입니다. 본격적인 휴가철입니다. 몸이 쉰다고 마음까지 쉬어지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진정한 휴식을 주기도 합니다. 휴가가 끝나고 일상에 복귀할 때 오히려 더 힘이 나게끔 말입니다. 그래서 성찰입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여자였다면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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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456쪽, 1만4500원

본격 독서에 들어가기 전에 책을 덧씌운 재킷을 벗겨 안을 보라. ‘세계의 작가와 미디어, 페란테 열병을 앓다’는 제목 아래 찬사가 쏟아진다. ‘책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이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움과 추함, 헌신과 속임수, 마술과 혐오는 곧 삶이고 우리 자신이다’…. 호들갑스럽다는 생각이 들 지경으로 호평 일색이다. 미국 배우 기네스 펠트로의 소감이 그나마 차분하다. ‘소녀 시절과 우정에 관해 놀라운 실력으로 글을 썼다.’

‘공격적이고 불안한 여성의 우정에 관한 심리적 통찰.’ 굳이 고른다면 이 한마디가 두툼한 소설 한 권을 집약하고 있다. 이탈리아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중 제1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는 두 여자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서막을 여는 회상이다. 1950년대 미항(美港)으로 이름난 이탈리아 나폴리를 무대로 릴라와 레누의 애증어린 10대 시절이 펼쳐진다.

화자(話者)는 만년 2인자인 레누다. 그가 경애해 마지 않던 동갑내기 친구 릴라가 어느 날 흔적 없이 증발한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친구의 속내를 피붙이보다 더 잘 이해하는 유년기 경쟁자 레누는 비범했던 소녀 릴라와의 어린 시절을 돌이킨다. “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20쪽)

아마도 누구에게나 비슷한 추억은 있을 것이다. 기를 쓰고 따라가려 애써도 도저히 역전이 되지 않는 눈부신 친구를 바라보던 가슴 쓰린 상처, 또는 질투나 두려움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종의 쾌감. 착한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밉상 소녀, 선생님과 급우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그 아이는 “날카롭고 도발적이고 치명적인” 완벽한 지성의 소유자로 떠받들어진다. 사춘기의 긴 터널을 “나는 끔찍하지만 빛나는 그 아이 곁에 머물러 있기 위해 나와는 거리가 먼 온갖 힘든 일과 공부를 하는 데 몰입했다.”(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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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60년 우정을 간직한 두 여성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통해 인간을 보여준다. [사진 한길사]

무엇이 이 운명적인 우정을 힘들게 했을까. 아마도 폭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첫째였지 싶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력,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34쪽)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랑이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청년이 정작 애정을 준 건 친구였음을 알게 된 뒤 화자는 쓴다. “내 마음은 아직도 배신당한 믿음과 정열적인 사랑, 책으로 태어난 노래로 뒤얽힌 은밀한 이야기에 온통 쏠려 있었다.”(169쪽)

단지 우정에 관한 장황한 주절거림이었다면 43개국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될 까닭이 없다. 이 성장소설은 다른 한 편으로 전후(戰後) 이탈리아의 사회상을 담고 있다. 두 소녀의 가족과 그 주변부 묘사에 그치지 않고, 옮긴이가 지적했듯 이미 나폴리를 기반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마피아 조직인 카모라(Camorra)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70년대 페미니즘 테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 소설가 한강씨가 『채식주의자』로 수상자가 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에 곧 번역돼 나올 제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이력이 있다.

[S BOX] “책 나오면 저자는 필요없다” 얼굴 없는 작가 페란테

엘레나 페란테는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하다. 엘레나 페란테도 필명이다.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으로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그는 외부 노출을 일절 안 하고 서면 인터뷰만 응하는 괴짜다. “책 자체가 어떤 가치를 충족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 은둔의 변이다.

서구 문학계에서 자신을 숨긴 채 오래도록 명성을 누린 작가는 꽤 있다. 미국 현대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2010)는 기벽으로 이름난 소설가다. 그의 기이한 일생은 할리우드에서 니콜라스 홀트와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로 제작중이다.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앵무새 죽이기』 단 한 편으로 유명세를 탄 미국 소설가 하퍼 리(1926~2016)도 은둔 작가로 평생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1914~80)는 본명을 감추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1975년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이 공쿠르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자살한 뒤 유서처럼 남긴 글에서 비로소 자신이 쓴 작품임을 밝힐 때까지 아자르는 유령 작가였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행복하고 싶으면 당장 스마트폰부터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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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316쪽, 1만7000원

요즘에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앉으나 서나 누우나 작은 화면만 쳐다보며 산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불행한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고대 오리엔트 문자와 문명을 전공한 고전문헌학자이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행복하려면 나 자신부터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의 상태다.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 그것이 곧 행복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저자는 자기 성찰의 네 단계를 제시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고독)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면(관조) 비로소 찾아오는 깨달음의 순간(자각)이 오고 그런 다음 자기다운 삶을 향한 첫걸음(용기)을 내딛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 여정의 역사는 오래됐고 동서양을 넘나든다. ‘사람들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레프 톨스토이)’와 같은 아포리즘 28개가 여정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언어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오래된 말의 근원을 설명하며 여정을 복돋운다.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사람을 뜻하는 영어 단어(person)가 파생됐다. 사람은 원래 가면을 쓴 존재다. 저자의 해설에 따르면 사람이 ‘가식적인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주에서 자신에게 맡긴 유일한 배역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했는지를 묻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영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스(sabbath)’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고, 본래의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일요일이 쉬기 위해서 마련된 날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알았던 삶을 내려놓고, 인생 초보자가 돼서 자기 주변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있는가? 살인에 대한 원초적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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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푸른숲
456쪽, 1만4800원

영국 히스로 공항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 바. 익명성이 담보되는 공간에서 만난 두 남녀는 혼자서만 간직해 왔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보스턴에 살며 남부 해안가에 새로운 집을 짓고 있는 남자 테드는 부인 미란다와 시공업자 브래드 사이에 흐르는 불륜의 기류를 감지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그녀를 죽이는 게 세상을 보다 이롭게 만들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윈슬로 대학에서 일하는 여자 릴리는 그런 남자의 머릿 속을 꿰뚫어본 듯 이야기한다. “솔직히 난 살인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게다가 당신 부인은 죽여 마땅한 사람 같은데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의 삶은 서서히 겹치기 시작한다. 막다른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모퉁이만 돌면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나타나는 식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기묘한 모의를 꾸민다. 어릴 때부터 홀로 해결책을 찾는데 익숙했던 릴리는 아무도 모르게 미란다를 없앨 방법을 제안한다. 실의에 빠져 있던 테드는 그녀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본다. 비록 이들의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말이다.

작가가 깔아놓은 덫에 차례로 걸려들다 보면 어느새 이들의 범죄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놀라운 흡입력을 자랑한다. 동시에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deserve to die)’ 사람과 ‘죽여 마땅한(worth killing)’ 사람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과연 죄로부터 완전무고하고 순결한 사람일 수 있을까. 메스처럼 예리한 문체로 휘젓고 간 후폭풍이 생각보다 거세다. ‘토탈 이클립스’ 등을 연출한 폴란드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영화화를 준비 중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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