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의 유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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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강 유역의 역사적 견적과 명승지들이 새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이들 사적·유적·문화재·명승지들 가운데는 강동구의 선사주거지·백제토성·삼전 도비나 행주산성·새남터 등 이미 널리 알려진 곳도 많지만, 이번에 새로 이름이 알려진 낯선 곳도 적지 않다.
우선 한강 하류부터 훑어보면 행주산성 맞은편의 공암진, 성산대교 북쪽의 망원정, 마포쪽의 토고천지·광흥창지, 한남동의 제천정, 옥수동의 독서당, 자양동의 낙천정, 응봉동의 입석포 등이 바로 그런 곳이다.
공암진은 한강의 가장 하류에 있는 나루터로 한강의 물줄기가 여기서 임진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들어간다. 동쪽에 돌이 쌍립해 있어 공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망원동에 있는 망원정은 태종의 차자인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다. 세종은 가끔 형님이 보고 싶으면 이 정자를 찾곤 했는데, 어느날 가뭄을 걱정하다가 이곳에서 단비를 만나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했다. 망원정은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이 고쳐 부른 것이다.
토정지는 유명한『토정비결』을 만든 토정 이지함이 큰 흙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기인이었던 토정은 가끔 집을 비웠다가 돌아올 때면 쌀 수천섬을 가져와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흙집에 쌀을 쌓아 놓기도 했다.
광흥창지는 와우산 동쪽 기슭에 있던 창고. 조선조 초기부터 전국에서 배로 들어오는 인미를 비축했다가 관리들에게 봉록을 주었는데 약 4만섬을 저장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
제천고는 한도십영의 하나로 망원정과 함께 한강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고우정승의 하나였다. 중국 사신이 오면 이곳에 배를 띄우고 술 마시며 시를 읊기도 했다.
선비들이 모여 글을 읽던 독서당은 중종 19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유래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금 창의문 밖에 있던 장의사를 하사하고 그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를 하게 한 것이 전통이 되어 나중에는 독서당으로 발전했다.
낙천정은 태종이 왕위를 물러난 후 지금의 자양동 동남쪽 한강변에 있는 대산에 이궁을 짓고 정자를 꾸몄던 자리다. 낙천정이란 이름은 당시 좌의정 박은(은)이『역경』에 있는 낙천지명고불하란 글귀에서 따왔다.
입석포는 앞의 유적지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당시 백성들이 건전한 행락을 말하는 가운데 입우조어를 으뜸으로 쳤는데 바로 입석포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뜻한다.
어쨌든 괴상망측한 유람선 때문에 한때 봉변을 당했던 한강이 뒤늦게나마 주변의 역사적 견적을 되찾게 됨으로써 그 체통을 지키게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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