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연설보다 쇼에 더 관심|비선거 유세장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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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닐라=홍성호특파원】필리핀의 선거 유세장은 축제처럼 흥겹다. 유권자들은 후보의 연설보다도 유세장에 함께 따라 나오는 인기가수와 배우들을 보려고 몰려든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남방민족의 기질을 후보들이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23일의 집권 KBL(신 사회운동당)의 마닐라 인근 슬럼가인 톤도시 유세장.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시한복판의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가까운 시골에서 10인승 합승버스 같은 지프들로 동원된 농민들도 속속 도착한다.
상오 9시쯤 되자 광장은 절반쯤 사람들로 메워졌다. 광장 둘레에는 선거 대목을 노려 몰려든 행상들이 얼음 냉차며 과일·생선요리·밥까지 해서 팔고있다.
조그마한 사탕수수밭을 갖고 있다는 50대 초반의 한 중년은 마을의 바랑가이 캡틴(이장에 해당)이 차비를 보태주어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무대처럼 꾸며 놓은 연단 위에 요염하고 시원한 차림의 여성 무용팀이 나타나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춤곡이 서너 번 돌아가자 이번에는 코미디언 2명이 등장, 관중들을 웃긴다.
인기남녀 배우들이 주동이 된 디스코 잔치가 끝날 때쯤이면 광장은 10만명이 넘는 인파로 뒤덮인다.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기다려 정오쯤 「마르코스」 대통령이 일단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입장한다.·
유세도중 지나치게 흥분한 청중들과 악수를 나누다 긁혀 상처가 났다는 오른손은 여전히 붕대로 감겨있다. 연단 위로 오르면서 군중의 환호에 그는 왼손만을 높이 들어 답했다. 부인 「이멜다」여사는 말라카낭궁에서의 스케줄 때문에 오지 못했다는 아나운스먼트가 있자 청중들은 적이 실망하는 낯빛이다.
청중들은 「마르코스」대통령의 연설보다도 「이멜다」여사의 노래 듣기를 더 좋아한다.
「마르코스」가 등단하여 격렬한 어조로 야당과 사신의 항일투쟁 게릴라전을 의혹 투성이라고 보도한 미국신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한다.
약 1시간에 걸친 그의 연설이 끝나자 연예인들이 다시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 「톨렌티노」부통령 후보가 자신의 라이벌인 「라우렐」에 대한 집중공격을 퍼붓는다.
이렇다 할만한 정책 소견발표와는 거리가 멀다.
그 대신 즉흥적인 선심공세는 두 후보의 공적기사를 스크랩하여 가져온 유권자에게 손목 시계를 선물하거나 판잣집 투성이인 달동네에 아파트 건설계획을 마련해 오도록 했다면서 유세장 단상에서 결재를 하기도 한다. 서너 시간 짜리 어설픈 쇼 무대를 보는 느낌이다.
야당진영 유세는 어떤가.
지난11일 중부 비사야지방의 중심도시 세부에는 25만명의 인파가 이들을 맞았다.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6백km 떨어진 세부시와 비사야지방의 주요도시인 라푸라푸 만다우에 등의 유세장 분위기를 아시아 위크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젊은이들은 「코리」와 「도이」를 뚜껑 없는 시프에 태우고 거리를 누볐고 그 뒤를 2천대의 자동차와 오토바이·자전거들이 따랐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25분이면 갈 수 있던 거리가 이날은 4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야당 측도 여당을 제압 할 만한 정책이나 비전은 제시하지 못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당의 금성탕지처럼 여겨지는 루손섬 북부지방 유세에서 1만명 이상의 인파는 모은 적이 없다. 야당 측은 『여러분들은 「마르코스」를 상원의원 시절부터 지지해 왔다.
그러나 그가 여러분의 복지를 향상시킨 적이 있는가』, 또는 「마르코스」에게 20년이라는 시간을 주었으니 이제 우리에게도 봉사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은가』라고 호소하지만 유권자들은 『경험이 풍부한 「마르코스」도 못해내는 일을 아무 것도 모르는 「코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니노이」(고「아키노」상원의원의 애칭)라면 몰라도 「코리」는 곤란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많다. 반면 모슬렘과 NPA,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살고있는 네그로스·사마르·세부·민다나오 등 중부 및 남부에서 「코리」의 인기는 높다.
이 같은 양분 현상 때문에 이번 필리핀 선거는 「필리핀의 남북전쟁」이라고도 일컬어진다. 3천만명에 이르는 유권자는 그 57%인 1천7백만명 가량이 루손섬에, 그리고 이중 1천만명이 루손의 3개 지역, 즉 메트로 마닐라 (수도권)·중부루손·남부루손에 집중돼 있다.
「마르코스」가 민다나오 등 남부지방 유세를 꺼리는 이유는 반 정부세력의 테러 우려도 있지만 유권자가 밀집돼있는 북부지방을 집중 공략하여 승부를 내겠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필리핀의 남북대결, 그것은 보수와 개혁의 대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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