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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롬 하이웨이를 가다. 고선지 장군의 발길을 따라<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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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칠라스의 숙소에서 걱정스런 사태가 벌어졌다.
조사단원 중 심한 토사병으로 식사를 전혀 못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할 때 황현탁 공보관은 절대로 물조심을 해야한다며 이곳에선 콜라보다 몇 갑절이나 비싼 스코를랜드산 자연수 4ℓ짜리 10병을 구해줬다.
우리는 그것을 아껴 조심스럽게 마시며 이곳까지 왔다. 「조심스럽게」마셨다는 것은 이곳 물을 마셔도 탈이 없는 「무하메드 칸」씨 앞에서 외국산의 값비싼 물을 마시는 게 어쩐지 미안한 것 같아서였다.
토사로 날이 밝을 때까지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재창 교수를 숙소에 남겨두고 활동을 개시한 것은 지난12월19일 아침8시.
워낙 촉박한 일정이였기에 하는 수 없었다.

<행여 한자라도 없나 암각화 샅샅이 살펴>
샹그릴라 호텔을 떠나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약1km북상, 중공측이 건설해줬다는 시멘트다리로 인더스강을 넘으면 강변의 여기저기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들이 눈에 띈다. 피르미르 고개라고 한다.
바로 거기, 큰 바위에 수백의 불탑 불상 법륜등 불교 암각화들이 새겨져있다. 바위의 석질이 단단한 탓인지 비록 얕게 새겨진 선각이었지만 비교적 선명히 남아있었으며 모두가 서기7∼8세기 이전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한사람이 어떤 특정시대에 한꺼번에 새긴 것이 아니고 오랜 시대에 걸쳐 이곳을 거쳐간 여러 불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진것이 분명한 불교유물이기에 행여나 중국승이나 신나승의 것이라도 보일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이바위 저바위로 찾아다녀 보았다.
막연하지만 이같은 희망을 가져 본 것은 4세기말∼5세기초의 13년간 인도여행을 마치고 그 여행기를 남겨 오늘날에도 학계에서 소중히 다루고 있는 중국승 법현의 『불국기』에 보이는 「타력국」이 바로 칠라스가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 승 신나 승이 이지역을 거쳐갔을 가능성은 법현의 경우만이 아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부』에 기록된 순서가 비록 가엽미나국(카시미르)을 깃점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소발률국(기르기트)에서 건타나국(페샤워르) 오장국(스와트) 구위국(치트랄)순으로 되어있다.
기르기트를 출발할 경우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안전한 행로는 기르기트를 남하해 탁실라에서 서로 페샤워르를 거쳐 스와트로 북상하고 다시 서 로치트랄로 가는 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혜초 또한 기르기트에서 탁실라로 남하했을 확률이 크다. 그런 경우 칠라스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 된다.
행여나 한자라도 한자 있지 않을까 하며 세밀히 살펴 본 나의 노력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후회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학문분야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낸다는 것은 금광의 맥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지나온 경험을 통해 몇번이고 겪어왔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이웨이를 빠져 나와 차 머리를 옛 비단길 측으로 돌려 예부터 시장거리인 바자르에 들렀다. 「바자르」란 여기말로 시장을 의미한다.

<활개치는 중공상품 싼값으로 시장석권>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 양편에 비좁고 낡고 얕은 지붕의 판자집이 참 빗살같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점에서 지나가는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귀를 찌르는것 같이 시끄럽다.
양복입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옛날 옷차림 그대로의 인파로 붐볐다. 상점안에 쌓여 있는 상품의 내용은 바뀌었어도 거리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바뀌어진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 직물 문방구 그릇에 이르기까지 중공상품이 활개를 치고있었다.
중공제 만년필 값을 물어 보았더니 미제 만년필인 세퍼와 꼭 같은 모양의 제법 감촉도 부드러운 것이 우리돈으로 9백원이라고 한다.
지리적인 조건뿐 아니라 가격면에서도 우리상품이 이지역에서 중공과 경쟁하기란 만만치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지고 간 고추장맛 김 장아찌의 맛을 빌어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버석버석한 밥과 우리 입에는 맞지 않는 카레닭고기로 점심을 때우고 기르기트로 향한 것은 그날 오후1시였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칸」씨와 운전기사가 출발할 때 『알라!』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긴장이 됐다. 마침 이곳 영자신문에 일본대학생이 기르기트 바로 못미치는 지점에서 히말라야쪽의 옛 대발률국의 수도인 스카르드로 가려고 차 머리를 돌리다가 전복해 죽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숨막힐듯한 산골짜기의 꼬부랑길을 달리는 기분은 어지간한 모험가라도 마음놓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겨를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곳곳에서 무너진 흙더미와 굴러 떨어진 바위를 치우며 차를 몰아야 하니 운전기사도 신경이 무척 날카로와진듯 자주 담배를 피워대며 마음의 긴장을 달래곤 했다.
거의가 돌과 모래땅으로 풀한포기 찾아보기 힘든 단조로운 풍경. 석회층이라도 씻어 내려오는 듯 뿌옇게 흐르는 인더스 강줄기 ,카라고룸 하이웨이의 이 구간은 삭막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가끔 구경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저기 산모퉁이의 김 서리는 곳에서는 뜨거운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노천 온천이다.
이길을 지키고 보수하는데 동원된 민병대원들이 웃옷을 벗고 몸을 씻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힘겨웠던 2시간을 북상끝에 우리는 분지라는 곳에서 잠시 쉬게 됐다. 이곳은 병영이 있어 군인들의 내왕이 많았다. 길가에 움막같이 보잘것 없지만 사람들이 제법 웅성거리는 차집이 있기에 그앞에 섰다.

<고장군의 격전지선 함성이 들려 오는 듯>
나무로 아무렇게나 만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차를 들고 있자니 동남쪽의 탁트인 구름사이로 산의 허리부분까지 온통 눈에 덮인 낭가파르바트 산의 웅대한 모습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손에 잡힐 듯 하다. 높이가 8천1백26m나 된다는 이산은 히말라야산맥의 서쪽끝이라고 「칸」씨가 설명해줬다.
내가 19살때 당나귀를 타고 만리장성위를 관광하면서 받았던 감동의 강렬함을 이제 60이 훨씬 지나 뜻하지 않은 이곳에서 낭가파르바트 산을 보면서 다시 느끼게 되다니 그 동안의 피로도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다시 1시간가량 달려 인더스강과 기르기트강의 합류 지점, 중공측이 건설한 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이르르면 주변의 경관은 일변한다.
강폭이 갑자기 넓어져 시야가 툭 틔어지는 것 같았다. 다리 건너편 동쪽으로 뻗어 우리 시야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는 길이 바로 대발률국으로 가는 통로이며 거기서 카시미르를 거쳐 갠지스강유역까지 이어진다.
여기가 바로 고선지 장군의 격전지의 하나다. 그곳의 위치와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1천2백년전의 함성이 저 벌판으로부터 들려 오는 듯하다.
일행이 인더스강을 뒤로하고 기르기트강을 따라 산모퉁이를 왼쪽으로 도니 바로 건너편에 높이 7천7백88m의 라카포시 산이 앞길을 가로막고 서있다.
그리고 저 멀리 기르기트의 시가지가 바다속의 섬같이 눈안에 들어온다.
기르기트로 들어가는 문턱의 정규군초소에선 장교와 사병 둘이 나와 차앞에 걸친 한글로 된 우리학술조사단의 표지판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훑어보면서 그 어느 곳보다 철저한 검문을 했다. 그러나 따뜻한 악수로 안전한 여행과 조사의 성과를 바라는 인사말도 건네고 차를 권하기도 했다.
이 초소에서 마주 보이는 만년설의 라카포시산과 그앞을 말없이 흐르는 기르기트강을 바라보며 시가지 입구의 기르기트 세레나 롯지 호텔에 도착, 여장을 푼것은 오후 3시반경.
해발 1천4백m가 넘는다는 기르기트에서 보이는것은 흰눈덮인 험준한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도 숙소 앞뜰의 화단에는 아직도 장미꽃이 피어 있었고 이름모를 덩굴나무엔 붉디붉은 꽃들이 만개해 그 요염을 자랑하며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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