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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환상의 빛'과 '태풍이 지나가고' 사이 달라진 것과 여전한 것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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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전히 눈부신데, 가슴은 뜯어내고 싶을 만치 시리다. 비극이 할퀴고 간 뒤에 남겨진 삶.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54)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세계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남겨진 자의 통증을 온전히 감내하는 일이다. 어쩌면 내 것이 될지도 모를 그 고통을. ‘아무도 모른다’(2003)부터 ‘걸어도 걸어도’(200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까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가 혹독한 고뇌를 담을수록 더욱 사랑받았던 이유다.

올해로 데뷔 21년째, 그 사이 그의 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마침 1995년 고레에다 감독을 세상에 알린 첫 장편 극영화 ‘환상의 빛’(원제 幻の光, 7월 7일 개봉)과 열한 번째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원제 海よりもまだ深く, 7월 27일 개봉)가 잇달아 개봉한다.

갑작스러운 자살로 남편을 잃은 젊은 여성의 상실감을 시적 영상에 담은 ‘환상의 빛’. 그리고 꿈은 유명 작가지만 현실은 아내에게 이혼당한 사설탐정 신세인 철부지 중년 남성의 작은 소동극 ‘태풍이 지나가고’. 다른 듯 닮은 두 영화를 타임머신 삼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바뀐 풍경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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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 중앙포토]


| 현실에서 길어 올린 영화



‘환상의 빛’과 ‘태풍이 지나가고’의 눈에 띄는 차이는 원작의 유무다. “어떻게 하면 극영화에서도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고레에다 감독. 삶에서 영화를 길어 내는 특유의 인장은 두 영화 모두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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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태풍이 지나가고`, 우 `환상의 빛`. [사진 중앙포토]

먼저 ‘환상의 빛’은 일본 순문학 대표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단편 소설을 토대로 한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고 자살한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세월이 흘러 미망인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행복한 재혼 가정을 꾸리지만, 여느 때처럼 미소 지으며 집을 나서던 그날 남편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야모토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전후(戰後) 일본의 참상을 그린 ‘진흙강’(1981, 오구리 코헤이 감독)을 좋아했던 고레에다 감독은, 유미코가 죽은 이쿠오에게 말 걸듯 써 내려 간 이 서간체 소설을 첫 영화 원작으로 주저 없이 골랐다.

그런데 ‘환상의 빛’에는 다른 모티브도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고위 관리의 자살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를 찍으며 고레에다 감독은 홀로 남겨진 미망인의 상실감과 죽음이라는 테마에 사로잡혔다.

전후 태어난 자신의 세대가 무의식중에 간직해 온 공허함과 불확실성에 대한 탐구 정신도 그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1979년에 나온 원작 소설의 무대를 영화에서 현대로 옮긴 건, “시대 배경이 아닌 상실감 자체에 관한 순수한 초상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후 1988년 일본 도쿄의 젊은 엄마가 어린 자녀들을 버린 실화를 토대로 한 ‘아무도 모른다’, 촬영 탓에 오랜만에 만난 세 살배기 딸이 자신을 서먹하게 느낀 일화에서 착안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그의 영화는 대부분 실화와 개인적 경험에서 발아했다. ‘환상의 빛’ 외에 원작이 있는 작품은 동명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와 ‘공기인형’(2009) 두 편 정도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감독이 “죽어서 신이 ‘이승에서 뭘 했느냐’고 묻는다면, 이 영화를 보여 주겠다”고 할 만큼 전작을 통틀어 가장 자전적인 작품. 그가 아홉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살았던 도쿄 연립 아파트의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제 촬영도 이 아파트에서 진행했다. 태풍 불던 밤, 사설탐정 료타(아베 히로시)가 이혼한 아내·아들과 함께 묵었던 어머니 요시코(키키 키린)의 아파트가 그곳. 노름 탓에 양육비조차 제대로 보내 주지 못하는 아빠 료타가 만년 소설가를 꿈꾸는 건, 고레에다 감독 자신이 한때 소설가를 지망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모두가 자신이 원했던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 빛과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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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사진 중앙포토]

풍경에서 영화의 심상을 얻는 고레에다 감독의 습관은 변함없다. ‘환상의 빛’에서는 구름 낀 잿빛 하늘과 바다, 서서히 변화하는 계절을 롱테이크·롱쇼트로 담아 유미코의 심리 상태를 표현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실제 태풍이 지나간 어느 날 어머니의 연립 아파트에 녹음이 우거진 풍경에서 영화의 첫 이미지를 얻었다. 다만 빛을 사용하는 법은 조금 달라졌다. “어둠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을 만큼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철저히 자연광만 고집했던 21년 전과 달리, 이제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적절히 활용해 영화 전체의 빛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한다”고 그는 말한다.

“영화란 무엇보다 경계와 단절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게 그간의 연출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교훈이라고.


| 죽음과 삶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죽음은 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슬그머니 나타나 삶의 풍경을 바꿔 놓는다. ‘환상의 빛’에서 치매에 걸려 혼자 집을 나선 뒤 영영 행방불명된 할머니의 뒷모습처럼. 하지만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풍요롭다”는 게 그의 지론. 할머니를 잃어버린 그날, 어린 유미코(요시노 사야카)가 훗날 남편이 된 이쿠오를 만났듯 망자의 빈자리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삶이 비집고 들어온다.

죽음에 비춰 삶을 반추해 온 고레에다 감독의 시선은 ‘태풍이 지나가고’에 이르러 한결 여유로워진 듯하다. 오랜만에 어머니 집으로 간 료타는 아버지 위패를 모신 불단 위 찹쌀떡을 덥석 베어 물고, 쪼들리는 생활비를 메울 만한 값나가는 유품을 샅샅이 뒤진다.

재미있는 건, 죽은 아버지가 그런 료타를 어디선가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고레에다 감독의 연출이다. 전당포 주인이 료타의 아버지에 대해 들려주는 일화는, 료타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을 새삼 각인시킨다.


| 어머니와 아이가 빚어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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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사진 중앙포토]

여전한 것도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는 어쩐지 여물지 못한 성인 남성이 자주 등장한다. 사회 적응 능력으로 말하자면 ‘환상의 빛’ 이쿠오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도 그리 뛰어나진 못하다. 이들을 삶에 딱 붙어 있게 만드는 존재는 바로 어머니(혹은 유사 어머니)와 아이들이다.

대개 그의 영화 속 어머니는 강인하다. ‘환상의 빛’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게 세 마리를 잡아다 유미코에게 준 바다 마을의 아낙, ‘태풍이 지나가고’의 품이 넉넉한 어머니 요시코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갈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어머니들이다. 아이들은 혼자 두어도 가장 빛나는 장소를 찾아내 천방지축 뛰어다닌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아이들이 유독 생기 넘쳐 보이는 건 아역 배우에게만큼은 연기 지도를 거의 하지 않고 마음껏 ‘뛰놀게’ 하는 독특한 연출 방식 덕분. 아이를 통해 그는 삶이 감춰 놓은 경이를 자연스레 영화에 불어넣는다.

마치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밀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는 듯이. ‘환상의 빛’부터 그의 전작을 관통해 온 이 모티브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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