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제의」와 「큰 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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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구체화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22일 기자 회견 내용은 「88년까지의 정쟁 지양 제의에 못지 않게 개헌 논의의 개방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노 대표는 개헌의 유보가 단순히 헌법 논의의 유보가 아니라 개헌 논리를 포용하는 적극적 의미가 담긴 것이라면서 그 내용과 결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로 임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비록 「89년 이후」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헌법 문제에 대한 이 같은 자세 변화는 그 동안 정부·여당이 보인 요지부동의 입장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 중에서도 헌법 논의를 전면 개방할 시점으로 못박은 89년 이전이라도 『국회 안에 헌법연구특위를 두어 헌법 논의를 장외가 아닌 장내에서 할 수 있다』고 한 대목은, 물론 야당이 벼르고 있는 1천만 명 개헌 서명 운동을 겨냥한 것이긴 하지만 개헌 문제에 대한 정치적 수요를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총론으로서 대통령 국정 연설과 「각론」으로서 노 대표의 회견 내용은 요컨대 88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차질 없이 이룩해 보려는 정부·여당의 일관된 의지를 담고 있으면서 한 쪽으로는 야당에 대해 타협의 손을 내민 유화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여당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야당의 반응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그다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노 대표 회견 후에 있은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두 김씨의 회동에서는 「개헌 논의 유보」 제의를 거부하고 서명 운동도 당초 예정대로 2월부터는 전개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5일 예정된 이 총재의 회견도 대충 그런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12총선 후 평행선만 그어 온 여야의 입장이 간단히 합치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정치 상황이 그렇게 안이하지는 않다.
평화적 정권교체와 86·88의 국가적 대사에 견주면 개헌 문제는 한낱 「소절」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민정당의 입장이라면 개헌과 민주화가 이룩되어야만 국가 대사도 제대로 치를 수 있다는 게 야당의 일관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어느쪽 주장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야가 대화와 타협 없이 정국을 원만히 수습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민의 한결같은 여망은 타협과 대화에 의한 대타결을 보는 것이다. 여당은 이를테면 대타결을 위한 대논제를 제의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이상 정치인들은 이에 대한 확답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강경이 강경을 부르고 그로 인해 해결은 커녕 정국이 걷잡지 못하게 경색되고만 경험을 12대 국회 들어서 만도 수없이 목도했다.
한족이 유화의 신호를 보냈으니 이번에는 상대방도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할 차례가 되었다.
여야간에 가로 놓여 있던 그 깊은 불신의 늪을 한꺼번에 극복하라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 것이다.
노 대표가 내놓은 제의의 진의를 파악하는데는 야당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고 시간도 걸릴 것으로 짐작된다. 정부·여당 또한 야당이 타협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툭 던져 놓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 아니고 성의 있게 야권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앞으로 있을 여야간의 접촉과 대화에 기대를 걸고자 한다.
당장 사직 당국에 계류 중인 의사당 사건 만해도 원내에서의 범법을 원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은 얽힌 매듭을 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진선 진미의 정치」란 있을 수 없다. 최선이면 더 바랄게 없지만 그게 성취되지 않은 이상 차선의 방안 가운데서 나은 것을 찾는 게 정치인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정쟁의 유예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파국의 유예다. 그래야만 우리 정치의 최대 과제인 「평화적 정권교체」도 스무드하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여당이 내놓은 「큰 정치」·「큰 제의」가 여야의 대화를 통한 「큰 타결」로 이어 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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