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심장에 비수 꽂은 크루즈, 차기 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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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크루즈(공화당 의원·왼쪽)과 도널드 트럼프(미 공화당 대선 후보) [중앙포토]

공화당 대선 경선 주자였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주)의 반란과 도널드 트럼프의 카운터펀치. 20일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퀴큰론스 아레나'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사흘째의 하이라이트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의 수락 연설에서 크루즈-트럼프의 충돌로 뒤바뀌었다.

경선에서 트럼프와 진흙탕 싸움을 벌였던 크루즈는 찬조 연설에서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지지는 않더라도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강하게 비난하는 수준이 예상됐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밋 롬니 전 대선후보 등 '반 트럼프' 인사들의 경우 "꼴 보기 싫다"며 아예 전당대회에 불참했다. 하지만 크루즈는 참석에 응한 만큼 극단적 행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밤 10시쯤 연단에 오른 크루즈는 이를 180도 뒤집었다. 연설 초반 "어제(19일) 밤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지명된 걸 축하한다"고 말할 때만 해도 곳곳에서 기립 박수가 나왔다. 물론 귀빈석에 앉아있던 트럼프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 장녀 이방카는 단 한번도 일어서지 않았고 박수도 치지 않았다.

그러나 연설 후반 "연설을 듣고 있는 여러분은 11월(대선 때) 집에 있지 말고 일어나 말하라. 당신의 양심으로 투표하라. 당신의 자유를 보호하고 헌법에 충실할 것이라 신뢰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장내에서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양심 투표'란 단어는 막판까지 트럼프의 후보 지명을 저지하려던 '네버 트럼프(Never Trump)' 세력의 대표 구호였기 때문이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커녕 다른 후보를 찍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CNN은 "크루즈가 '11월 대선에서 트럼프는 질 것'이라 생각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 진단했다.

그는 또 "우리는 원칙을 위해 설 지도자가 필요하다. 사랑으로 분노를 없앨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 역시 '반 트럼프'의 단골 구호다. 일부 관중들은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루즈의 부인 하이디는 흥분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욕설을 퍼붓는 등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되자 경호원 등에 의해 대회장 밖으로 격리됐다. 장내에 있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끔찍하고 이기적인 연설"이라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차기 대선 2020년을 노리고 크루즈가 '쇼'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순간 귀빈석 쪽을 지켜보고 있던 기자의 눈 너머로 트럼프가 보였다, 귀빈석 뒤쪽 계단에서 입장을 준비하고 있던 트럼프가 크루즈의 발언과 장내 혼란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는 당초 크루즈의 연설이 끝나고 그 다음 차례인 차남 에릭의 찬조 연설에 맞춰 깜짝 등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크루즈의 연설이 끝나기 30초 전쯤 돌연 귀빈석 쪽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트럼프를 발견한 관중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함성을 질렀다. 결국 크루즈의 연설 끝부분은 이들의 환호에 묻히고 말았다. 그가 연설을 마치고 퇴장할 때도 모든 관중의 시선은 트럼프 쪽으로 쏠렸다. 지지 표명을 거부한 크루즈에 '한방'을 먹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흥행사(showman)의 직감으로 대회장으로 들어간 트럼프에 의해 크루즈는 완전히 내쫓겼다"고 보도했다. 미 언론은 공화당 관계자들을 인용, "크루즈의 이날 연설은 공화당 측에 제출한 것과 달랐다"고 전했다.

마지막에 등단한 펜스 부통령 후보는 수락 연설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오바마 정권의 연장이고 제3기일 뿐"이라며 "하지만 오늘로부터 정확히 6개월 후(차기 대통령 취임식은 1월20일)에 그런 시도를 끝내버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리블랜드=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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