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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선지장군의 발길을 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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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 것은 지난 해12월17일 아침. 우리는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타고 북상했다. 험한 산길에 견딜만한 새차를 골라 세를 냈으나 역시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아스팔트길을 서북으로 약 1시간가량 달려 탁실라에 도착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32km지점. 낡은 판자집이 산만하게 늘어선 구시가지와 단층이지만 새 개발지에 새로 형성되고 있는 신시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어 짜임새 없이 보이는 소도시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도시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극히 제한된 조사일정이었지만 이 초라한 도시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아득한 옛날부터 서북의 힌두쿠시방면과 파미르 고원에서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아무다리야강 방면에서 남하하는 세력의 통로이며 동시에 동남으로 카시미르 지방의 수도인 북인도 스리나가르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인도대륙을 향하여 쳐들어 오는 종족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가야 했기에 이곳만이 지니는 문화의 다양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기전 15세기 인도 아리안족에 이어 서기 전 6세기부터 약3백년간의 페르시아 지배, 그리고 서기전 329년 '알렉산더'대왕의 침입, 그리스의 점령 및 그 후의 월지. 터키족의 침입과 그들의 인도서북부 지배가 모두 이 탁실라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숱한 유물. 유적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그리스화폐를 비롯한 각종족의 다양한 화폐와 그리스 기법의 불상. 문화재는 이 지방의 지난 날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특히 처음 그리스인이 건설했다는 탁실라안 시르쿱 지역의 옛도시 유적은 그 뒤 이곳을 점거한 여러 종족이 다시 그들의 문화요소를 보태며 내려온 흔적이 역력했으며 그리스 문화와 불교의 융합과정을 더듬어 볼 수도 있어 매우 흥미로왔다.
이밖에도 자우리안대사원과 거대한 불탑, 여러 사찰유적과 아쇼카왕이 건설한 비루모운드의 옛도시유적, 페루시아의 고대종교인 배화교의 제단이 있는 잔다르지역은 단지 그곳이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파키스탄에까지도 이어지는 종족과 언어의 다양성의 맥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 탁실라는 며칠이라도 머물러야 하는 곳이지만 발걸음을 서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하루 빨리 고선지장군의 발자취를 살펴 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서 였다.
고선지 장군에 대한 나의 이같은 관심은 그가 고구려출신이라는 단순한 종족적인 편애만이 아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여기서 잠시 고장군의 군인으로서의 업적과 인간상부터 더듬어보고 넘어가야 겠다.
그의 아버지 고사계가 망국의 군인으로 당에 사로 잡혀 장교인분으로 복무한 이곳이 당제국의 안서도호부였으니 고선지장군은 바로 어릴 때부터 비단길의 거친 바람속에서 성장했다.
당의 안서도호부는 지금의 중공 신강성, 즉 돈황에서는 서로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드 고원까지 타원형으로 뻗쳐있는 동서6천리, 남북 1천리의 타클라마칸 대사막에 흩어져있는 여러 오아시스국가를 통치하는 군정기구였기 때문이다.
일찌기 이지역을 여행한 법현이나 현장이 기록했듯이 "해골을 찾는 것을 여로의 목표"로 삼는 험한 길이지만 사막안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의 성곽도시를 따라 아득한 옛날부터 중국의 비단이 유럽에 흘러들어갔고 인도의 불교. 마니교같은 종교의 조각미술등이 중국에 전래돼왔다.
서기전2세기 한무제이후 역대중국왕조가 터키족과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안간힘을 기울였던 것은 미술. 음악이나 악기는 물론 후추. 마늘. 당근. 포도. 호도. 수박. 오이. 호박. 석류같은 서방세계의 식물까지도 들어왔던 길이므로 무역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이같이 당으로서는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안서도호부에서 고선지가 군인으로서 빛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의 국제정세는 매우 긴박해지고 있었다. 즉 동의 토번(티베트)은 인도북부를 뚫고 그 세력을 지금의 파키스탄까지 뻗쳐 당의 비단길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반면 서에선 이 비단길의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아바스조의 아라비아가 또 이 통로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을 때 였다.
이미 당의 세력하에 있던 지금의 파키스탄의 간다라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강의 여러 군소국가가 토번의 서북진출에 동조하는 정세였고 기르기트 또한 당과의 맹약을 어기고 토축과 손을 잡게 되자 당현종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다.

<"72국 무릎꿇었다">
젊을 때부터 이 비단길의 싸움에서 올린 전공으로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까지 승진한 고선지가 현종의 촉망을 받아 기르기트가 수도인 소발률국 원정의 총사령관으로서 쿠차를 출발한 것은 현종의 천보6재(747년)3월이었다.
이 원정의 로정은 프랑스의 동양학자'사반', 3회에 걸쳐 이지역을 실지답사한 영국의 '스타인'의 저서등에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하는 것은 오히려 쑥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원정을 요약해 보면 쿠차를 출발한 고선지의 당군이 비단길의 교통중심지인 카시가르로 나와 파미르고원 남단인 신강성 타시쿠르간과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영인 파미르천을 따라 시그난(오지익국)에 도착하는데 만도 1백여일이 걸린 강행군이었다.
타시쿠르간, 즉 총령수착은 당시 당의 최전선기지를 말하는 '수착'이 두어진 곳으로서 파미르고원을 중국에서는 '총영'불렀던 것이다. 타시쿠르간은 예부터 중국에서 인도나 서방세계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으며 오늘의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중공측 깃점이기도 하다.
고선지군은 다시 서로 진격, 와캉천을 따라 아프가니스탄의 동쪽경계선인 사르하드를 깨뜨리고 동남으로 진격로를 잡아 해발 4천5백미터의 험준한 파키스탄 서북경계선인 달코트에 당도했다. 이때 감군(왕명을 받고 따라 다니는 감시군인)인 변영성조차 더 이상 진군을 거부하는 형편이었으나 고선지는 기어코 달코트를 넘어 소발률국의 왕성이 있는 기르기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기르기트 진군에 대해서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도 더 성공적인 것"(스타인)으로 평가한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은 전한의 사흠이 묘사한대로 "그 지방 특유의 고약한 병과 비좁고 앞길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늪으로 여행자는 서로 밧줄을 잡고 당기며 넘어야 하는 "파미르고원의 험로에서 1년에 넘는 작전을 수행했으니 말이다. 중국의 무악인 갈지곡가운데 "파발률"이라는 일곡은 중국사람들에게 이 고선지의 기르기트원정과 그 전과가 얼마나 자랑거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고선지의 원정으로 당은 토번의 비단길침공을 막았을 뿐 아니라 토번의 아라비아등 서방 여러 나라와의 연결을 차단함으로써 "신당서" '고선지전'에 "이에 동로마-아라비아-제호72국이 모두 떨어서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발률국에의 원정으로 안서로호부의 총사령관인 도호로 승진한 후에도 토번의 끈질긴 책동으로 힌두크시산맥의 소국인 갈사가 당의 영을 거역하자 천보9재(750년) 에 다시 이곳까지 쳐들어가 평정하는 성과를 거두기로 했다.
갈사는 파키스탄의 치트랄로 알려진 곳이며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선이니 고선지의 말굽은 인도대륙의 전역을 짓밟아 숨쉴 여유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맹장도 싸움마다 꼭 이기는 법은 없다. 우리의 고선지장군도 750년을 고비로 좌절의 시대를 맞게 됐다.
즉 천보10재(751년) 아라비아를 주축으로 아랄해. 카스피해의 여러 나라군으로 편성된 연합군과의 싸움이었던 탈라스전에서의 패전은 그에게 더 없는 치욕이었음은 물론 당의 위신추락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르톨드'가 "역사적인 이날에 아시아의 운명이 결정됐다"고까지 평할 정도로 고선지의 탈라스패전은 당시의 아시아형세를 바꾸어버린 큰 사건이었다.

<'손자병법'의 군인상>
이 패전후의 불운한 고선지의 처지에 대해선 중국이 낳은 최대의 시인 사보까지도 고장군이 사랑하던 말의 한가롭고 지루한 생활을 그려 그의 딱한 생활을 동정한 "고도독 총마의 노래"를 남겨 지금도 중국인에게 애송되고 있다. 당시 패전으로 아라비아군에 사로잡힌 당군에 제지기술자가 끼여있었다.
이통에 화약.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3대발명의 하나인 제지기술이 서방에 전해지게 된 것은 뜻하지 않게 문화사상 큰 의의를 갖게 됐다.
종이의 수지량이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고선지는 마땅히 서방제국의 문화발전의 은인이 돼야 할 것이다.
고선지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다. 천보14재(755년)에 일어난 안록산의 난은 당이 또 다시 옛영광을 되찾지 못할만큼 혼란을 가져온 사건이었으나 그의 용맹과 천부의 능력에 기대가 걸려 다시금 현종의 부름을 받게 됐다. 고선지가 다시 전쟁터로 나가게 된 것은 그에게는 더없는 행운의 신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전술상의 퇴수가 감군이었던 변령성의 비위를 거슬렸다. 결국 그의 모함으로 전쟁터에 나간지 겨우 1개월만에 진중에서 안타까이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부하들 앞에서 참형을 받음으로써 파란많았던 이 전쟁의 천재는 죽어갔다.
"신당서" '고선지전"이나 "자치동감"에 보이는 그의 인간상과 행동은 "손자병법"에 보이는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 그대로다. "승리후에는 군공을 탐내지 말라. 패전에서는 그의 책임을 회피해 죄를 피하지 말라. 군인의 사명은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을 보호하는데에만 두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켰던 점에서 고선지가 남긴 전과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계속 북상, 기르기트를 향해 하이웨이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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