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모욕한 김일성 주장은 날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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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최철주 특파원】일본에서 발행되는 월간 「세계」지 2월 호는 동지가 지난해 8월 호에 실었던 「김일성 회견기」를 반박하는 한국학자 김학준 교수(민정당 국회의원)의 글을 실어 주목을 끌고있다.
일본의 좌파 월간지로 알려져 있는 「세계」지는 85년 8월 호에 실린 김일성 회견기에서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발의한 1948년의 평양 남북회담을 북한이 제의한 것처럼 왜곡하고 ▲김구 주석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죄과를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더욱이 한국에서 여의치 않으면 다시 나올 테니 과수원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는 등 사실을 날조, 김구 주석을 모욕한 김의 발언을 실었었다.
이 회견기의 기록과 번역은 북한측에서 맡았다고 「세계」지는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 전체는 북측의 일방적인 선전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지는 금년 2월호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각종자료와 문헌, 그리고 당시 김구 주석을 수행한 선우진 비서의 회고 등을 인용, 1948년 당시 김구 주석이 남북협상을 제의 추진한 배경과 평양회담에 참석한 비장한 결의, 그리고 이 회담의 진상과 비화 등을 소개, 김일성 주장의 허구성과 역사날조를 폭로한 김 교수의 반박논문을 게재했다.
다음은 김 교수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세계」지 85년 8월 호에 수록된 김일성 회견기 『해방 40년을 맞으며』의 말미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재하며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백범 김구와 그가 발의했던 48년의 남북회담에 대한 김일성의 견해가 실려있다. 필자는 반론을 통해 왜곡된 부분을 시정하고자한다.
첫째, 김구가 북에 들어오기 전에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쳐 김일성은 과거 일을 백지로 돌린다고 말했다는 대목, 또 백범이 김일성을 만나 「사」함을 요청했다는 대목이다.
당시에 백범은 한말부터 항일독립투쟁에 헌신해온 한민족의 대표적 혁명가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백범이 전설적 항일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빈 39살의 김성주에게 「사」함을 구할 「자기 죄과」가 무엇이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김구는 북한이 소집한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남북회담이 북한 제의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주며 김일성은 그것을 겨냥한 것 같다. 그러나 각종 1차 자료, 그리고 이것에 바탕을 둔 권위 있는 연구들은 남북회담을 제일 먼저 제의한 이는 백범임을 증명하고 있다. 백범과 우사가 보인 순수한 민족주의적 자세를 북한당국이 배신, 평양회의를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공산사회 특유의 군중 집회로 만든 것이다.
셋째, 김구가 자기들이 상해에서 「말공부 질」만 하고 있을 때 장군은 손에 무기를 들고 싸워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였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이 발언을 통해 김일성은 백범이 마치 임시정부가 「말공부 질만」한 것으로 자기 폄하한 듯한 인상을 주고자 했다. 임정의 주석인 백범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리도 없거니와 백범의 독립 방략 그 자체가 무장유격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백범이 지시한 이봉창 사건·윤봉길 사건·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얻어 광복군을 조직한 점등이 그 증거다.
넷째, 김구는 북한에 있고 싶으나 여기에 남아있으면 반동들이 북조선에서 나를 억류하였다고 할 것이니 나가겠다고 한 대목이다.
백범의 수행원들이 이미 증언했듯이 백범은 『연금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어딘가 험한 분위기』를 느껴 잔류를 단호히 거절했던 것이다.
다섯째, 과수원 이야기다. 백범은 검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다 「정 곤란하면」 대의를 위해 일신을 바칠 분이지 남에게 청하여 얻은 과수원에서 여생을 보낼 분이 아니다.
또 김구가 요청했던 관개용수를 비롯한 4개항도 하나도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이 없다.
지면 제한으로 이 정도로 반론을 마친다. 김일성의 백범에 대한 모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그 법통을 승계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격하시키려는 북한의 선전활동의 일환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총괄을 삼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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