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격퇴 위해 ‘철권’ 에르도안 도왔지만…오바마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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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15일(현지시간) 터키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한 지 수시간 후 버락 오바마(사진) 미국 대통령은 “터키의 모든 정당은 민주적으로 선츨된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EU)을 주도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같은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첫날엔 “민주적 선출 정부 지지”
다음날 “모든 당사자 법 따라 행동을”
미국·유럽, 에르도안과 틀어지면
IS공습·난민 공조에 균열 올까 우려
미 외교협회장 “쿠데타를 지지할지
비민주 지도자 도울지 고민에 빠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준 국제사회의 뜻대로 쿠데타는 6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터키는 이슬람국가(IS) 격퇴, 시리아 난민 문제 등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혼란의 중심에 있다. IS 거점지인 시리아·이라크와 국경을 맞댔으며, 난민이 유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터키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미국과 EU 입장에선 쿠데타가 일단락돼 터키의 권력이 안정된 건 한시름 놓을 일이다.

그러나 국제 문제 전문가들은 서방의 고민은 이제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15일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외교관들은 에르도안이 군부의 확실한 지지를 얻었다고 판단했으며, 쿠데타 직전까지도 터키에서 쿠데타가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고 전했다. 통제 가능하고 안정된 국가라는 동맹 국가로서 터키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로 에르도안 정권의 취약성은 드러났고 서방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됐다.

당장 미국은 터키의 인서리크 공군기지 운영이 마비돼 IS 공습을 중단했다. 터키 정부가 기지 상공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시리아 국경에서 96㎞ 떨어진 인서리크 기지는 지난해부터 미군이 사용 중이다. IS 목표물을 폭격하는 전투기와 무인기(드론)를 출격시키는 IS 공격의 핵심 기지다. 크리스토퍼 하머 미 전쟁연구소(ISW) 연구원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기지 폐쇄가 나흘 이상 계속되면 공습이 상당한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국방부는 16일 “터키 정부와 인서리크 기지의 작전 재개를 협의하고 있다” 고 발표했다.

유럽도 전전긍긍이다. 지난 3월 EU는 난민 유입 차단을 조건으로 터키에 비자 면제와 경제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지 세력 확보를 위해 난민을 적극 수용할 경우, 유럽에 난민이 밀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에르도안은 지난 2일 “난민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발언해 새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들었다. NYT는 “유럽인들은 난민 위기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초래했다고 믿는다”며 “난민을 막지 못한다면 EU가 붕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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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16일(현지시간) 친(親)정부 시위대가 터키 국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15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한때 방송국 등 수도 앙카라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지만 6시간 만에 정부군에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과 쿠데타 지지세력, 민간인 등 265명이 숨졌다. [이스탄불 AP=뉴시스]

당분간 숙청과 내정 수습에 몰두할 에르도안에게 IS 격퇴 등 국제 정세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에르도안은 미국에 체류 중인 자신의 정적 펫훌라흐 귈렌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고 미국에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 문제로 터키와 미국이 각을 세울 경우 IS와의 전쟁은 중단될 수도 있다.

에르도안 정권의 성격도 서방의 고민거리다. NYT는 “이슬람주의로 회귀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에르도안의 비민주적 행보는 서방을 당황시켰다”며 “미국은 민주주의 수호 본능과 권위주의 정권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장도 “미국은 비민주적 쿠데타를 지지할지, 비민주적인 지도자를 지지할지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미국의 사정 때문인지 쿠데타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입장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쿠데타 직후엔 지지를 선언했지만 16일엔 “모든 당사자가 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며 법치(法治)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터키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16일 USA투데이는 칼럼에서 “미국은 에르도안의 목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맹이라고 지원하기에 급급했다”며 “터키가 이끄는 대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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