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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좋은 계절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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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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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에 시달리던 여름날 이 영화를 보러 갔다. 오랜 기간 팬이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5년 데뷔작 ‘환상의 빛’(사진)이다. 일본 소설가 미야모토 데루의 소설이 원작. 지난 7일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했다. ‘원더풀 라이프’ ‘걸어도 걸어도’ 등의 영화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다정하게 응시했던 고레에다 감독의 시작점을 살필 수 있는 영화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는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질문이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남편 이쿠오(아사노 다다노부)가 갑작스럽게 전차에 치여 사망한다. 사랑하는 아들이 태어나 누구보다 행복했던 일상, 남편에겐 뚜렷한 슬픔이나 좌절의 흔적이 없었다. 가장 가까웠던 이가 자살했지만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아내. 그렇게 답이 없는 질문에 시달리던 유미코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어촌 마을에 살고 있는 다미오(나이토 다카시)와 재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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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둡고 모호하다. 감독은 작정한 듯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저 쓸쓸한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유미코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유미코는 새 남편의 가족과 큰 갈등 없이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계절은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는” 유미코.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는 남편 다미오에게 울먹이며 고백한다.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모르겠어,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견딜 수가 없어.” 다미오의 담담한 대답.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

나의 노력과 무관한 비극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없는 무기력에 휩싸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믿음도, 그래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느끼는 것도, 어쩌면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환상의 빛’일지 모른다고 감독은 침묵으로 속삭인다. 하지만 그저 체념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 시종일관 검은 옷만 입던 유미코는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옆의 누군가가 말한다. “좋은 계절이 왔어.”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만 서로의 고통을 보듬으며 함께 좋은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영화는 그렇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