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브렉시트’ 영국이 부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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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7일은 제헌절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국민 기본권 등을 담은 헌법이 제정된 날이다. 하지만 정작 국기를 게양하는 집은 많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에 오랜 만에 헌법 전문을 다시 읽어봤다. ‘국민’이라는 단어를 하나하나 세어보니 총 130개 조문에서 무려 69번이나 쓰였다. 덕분에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더 분명해졌다. 그 어떤 것보다 국민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책임’ 비난 받지만 국민 위한 결정
수출담합 허용, 외국인임금 차별 등
자국민 보호 정책, 우린 왜 못하나

최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이하 브렉시트)’ 결정을 두고 대다수의 해외 언론들은 ‘멍청하고(stupid), 무책임하다(irresponsible)’ 등의 반응을 보였다. 과연 영국민들이 정말 ‘멍청’하고 ‘무책임’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전통적으로 영국은 ‘유럽 대륙’과 달랐다. 우선 법 체계부터 다르다. 유럽은 법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규정하는 성문법 중심인 반면, 영국의 법은 기본적인 것만 정해 두고 법원의 판례와 관습법을 근간으로 하는 관습법이 중심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럽은 상대적으로 정부 규제와 형평에 무게를 둔다. 반면, 영국은 시장경제와 효율을 중시한다. 종교도 영국은 일찌감치 성공회를 창설해 독자노선을 걸었다. 해외 언론의 반응은 영국과 유럽이 하나란 전제로 브렉시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하며 이를 결정했다. 남의 눈엔 공동체 ‘탈퇴’였겠지만, 영국인에겐 국익을 위한 ‘탈출’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도 남의 잣대를 기준으로 한 대의명분에 연연해 실속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아쉬움이 들 때가 잦다. 환경정책부터 보자. 화석연료를 태우면 이산화탄소(CO2)를 비롯해, 미세먼지, 황산화물(SOx), 질소산화물(NOx) 등 여러 오염물질이 발생한다. 이중 이산화탄소는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불편은 적다. 반면 미세먼지·SOx·NOx 등은 우리 국민의 호흡기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여야 하나. 미세먼지 등의 해소가 먼저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는 친환경국가 이미지를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권거래제 등 이산화탄소 관련 규제에만 열을 올렸다. 자국민의 건강은 희생하면서, 세계인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꼴이다.

공정거래정책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세계 1위의 반독점규제 벌금 규모를 기록할 만큼 엄격한 공정거래법을 가진 나라지만, 수출산업에 대해서는 담합을 인정한다. 자국 생산자에게 이득이 될 뿐만 아니라, 자국 소비자에게는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공정거래법은 미국민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세계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조선 등 수출산업의 경우, 담합은 커녕 해외 수주에서 ‘제 살 깎아먹기’ 경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득은 온전히 외국 소비자의 몫이다. 미·일 정부였다면 지금 우리와 같이 가만히 있었을까.

노동정책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한 예로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가 넘는 싱가포르의 경우,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월급은 기본 50만원에 불과하다. 연봉으로 계산하면 싱가포르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약 10%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자국민과 별도로 관리하는 노동정책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내·외국인 근로자 간 차이를 두는 건, 싱가포르라는 국가는 자국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반면, 1인당 국민소득 2만6000 달러의 한국은 외국인고용법에 의해 여러 고용조건뿐 아니라 최저임금까지도 내·외국인을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선 외국인 가사도우미 고용이 불법이지만, 만일 고용이 가능해진다면 법에 따라 최소한 월 126만원을 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의 절반이 넘고, 싱가포르에 비해 절대금액은 2.5배, 1인당 국민소득 대비 5배의 금액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경제가 어렵다. 주력산업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고, 국민들은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68번째 제헌절을 맞아 국가와 국민을 다시 생각해본다. 답은 무려 69번이나 헌법에 강조돼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 소신껏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의 자신감이 부럽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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