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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희곡 가작<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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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등장 인물>
바우 (60대 초반의 남자)
산네 (30대 초반의 여자)
땅꾼 (40대 중반의 남자)
며느리(바우의 며느리, 30대 초반)

<장소>
경상도 지방의 어느 깊은 산중.

<때>
현대, 가을, 오전.

<무대>
산 중턱에 있는 양지바른 평지. 무대 한가운데에 남근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오른쪽에 바우의 움막. 왼쪽으로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나 있다. 새로 세워지고 있는 남근상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데, 좌대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주위엔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울창한 수목. 이따금씩「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막이 오르면 아침. 무대 가득히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요란한 새 소리. 무대는 더없이 적막한데 산네가 남근상 좌대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우의 움막을 노려보고 땟국에 전 적삼에다 고쟁이 바람이다. 치마는 남근상에 씌워져 이윽고 바우가 움막에서 나온다. 막노동자 차림이다. 그를 본 산네, 소스라치듯 발딱 몸을 일으킨다. 한번 이윽히 산네를 바라보던 바우, 천천히 굽혀 연장통을 집어든다>
산네-(발작적으로) 안된다. 오지 말거라.
바우-(우뚝 멈춰선다)
산네-내 땅이다. 어림읍다!
바우-(잠시 산네를 바라본다. 노엽고 안타까운 눈길이다. 이윽고 다시 다가선다)
산네-(발을 구르며) 당장 내려가거라! 니 죽고 내 죽는다!
바우-(그래도 다가선다)
산네-산에도 법 있다! 누구 마음대로 남의 땀에다 뿌리 박을라 카노!
바우-(산네 앞에서 우뚝 멈춰 선다)
산네-와 하필이면 내 땅이고? 혼자사는 년은 산까지 무주공산이라 카더나?
바우-(계속 노려보고 서 있다)
산네-어림반푼없다! 이산 정기 바라고 이날 이때까지 수절하고 살았다!(와락 달려들어 바우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며) 뿌리도 제 당이 있어야 박는기라! 니가 뭔데 남의 땅에다 저거 세울라 카노? 니가 뭐고 말이다!
바우-이런 우라질…. (거세게 뿌리친다)
산네-(더더욱 달라붙으며) 죽여라! 차라리 날 죽여라! 누구 땅인데 니 맘대로 들어와서 남의 산정기 다 뺏아 갈라 카노?
바우-(산네를 힘껏 밀쳐 버린다)

<저만큼 나가떨어지는 산네>
바우-(연장통을 내려 놓고 좌대에 털썩 주저 앉으며) 할일이 없으면 개 뭣이나 핥아 주고 자빠졌을 일이지….
산네-(쓰러진채 바우를 쳐다보며) 이놈아, 지옥문이 훤하다! 우리 아배 죽은 귀신이 니놈 그냥 둘 줄 아나?
바우-(담배를 꺼내 물며) 그놈 만나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산네-(일어서며) 부처님 섬기지 말고 복장을 고치라 캤다! 남의 자식 패태질치면서 지 새끼 명줄 비나? 아나 여깄다, 명 받겠다!
바우-(물끄러미 산네를 바라보다가) 산네 니 금년에 몇이고?
산네-(문득 눈꼬리가 풀린다. 그러나 금방 샐쭉해지며) 인간 덜된게 나 자랑한다 카더라!
바우-내가 뭐 할 일이 없어 니한테 나 자랑하겠노? 내사 마 북망산천에다 묏자리 마련해야 할 사람인기라. 하지만 니는 아직 청춘 앙이가? 인자는 좋은 서방 만나 갖고 오붓하게 살아 봐야 할 거 앙이가?
산네-(안간힘으로) 니 코가 석자다! 나는 서방 없이도 산다!
바우-그기 어디 사는 기가?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 살내를 맡고 살아야 하는 기라….
산네-(쓸쓸해진다. 그러나 안간힘으로) 걱정 말거라. 산하고 살끼다!
바우-산이 제사지내 준다 하더나?
산네-(입을 삐죽하며) 자식 있는 사람도 별 영검 없더라.
바우-(눈을 홉뜨고 산네를 노려본다)
산네- (움찔한다)
바우- (타이르듯) 봐라, 산네야. 인생살이는 목에다 탯줄을 감고 가는 것 인기라. 나도 내 한 몸 생각만 했다면 이 꼬라지 안됐다. (독백처럼) 다, 자손들 발복하라꼬…. 그래서 이 산도 안 팔아묵았나?
산네-(어떤 광기에 휩싸이며) 시끄럽다! 그저, 오늘밤에라도 콱 뒈져 삐리라. 자식 앞세우고, 재산 다 날리고, 대체 이기 무슨 꼴이고? 나 같으면 혀를 빼물고 엎어지겠다!
바우-다 팔자제. 팔잔 못 속이는 기라.
산네-팔자는 마음먹기라 캤다!
바우-그래, 날자는 마음먹기에 달린 기다. 니도 일찌감치 마음 고쳐먹고 이산 떠나거라. 실팍한 사내나 한 놈 낚아채서 말이다.
산네-사내는 몽땅 도둑이다!
바우-(한숨을 내쉬며) 액땜한 셈치거라. 한 번 속지 두번이사 속겄나? 개보다 못한 게 인간이라 카지마는 그래도 쓸만한 놈 한 놈은 있을 끼다.
산네-다 죽았다. 난리 때 죽고, 서울가서 다 죽았다.
바우-(흘기며)그기 무신 소리고?
산네-몽땅 허깨비다! 벼락 안 맞을 놈 한 놈 읍다! 있거든 내 앞에 세워 바라!
바우-(이윽고 얼굴을 돌리며) 그 놈이 죽일 놈 이제… 이 산에서 땅이나 일구며 살 일이지….
산네-시끄럽다! 니 앞이나 닦아라!
바우-(계속해서)실한 자식 키우면서 산이나 가꿀 일이지….
산네-일 읍다! 산 있으면 산다!
바우-여름해도 잠깐 이제. 어영부영 가을인기라…. (연장통 속에서 망치와 끌을 찾아 들고 일어선다)
산네-(막아서며) 안 된다! 내 땅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어물 뿌리박을 생각 말거라!
바우-(답답하다는 듯) 이봐라, 산네야…저게 니 땅 잡아먹은들 얼매나 잡아묵겠노? (산을 휘둘러보며)옛날에는 알밤만 삼백석씩 따던 산이다. 골은 또 얼마나 깊으노? 옛정 생각해서 땅 몇평 거저 줘도 죄 안될 끼다.
산네-내 산 아니다. 우리 아배 산이다. 어느 놈한테도 뺏기지 마라 캤다!
바우-괜찮다. 뭐라고 안 할끼다. 느거 아배한테 이 산 넘겨줄 때, 그때 약속한 게 있다.
산네-옛날 얘기 할 거 읍다. 우리 아배가 빨갱이로 몰린 느거 아들 안 빼내 줬나? 그때, 돈을 지게로 지고 갔다. 이제는 우리 땅인기라!
바우-누가 아니라 하나? 하지마는 약속을 한기라. 저거 다시 세울 때….
산네-(말을 끊어) 도끼로 쾅쾅 찍어 넘긴게 누고? 나도 봤다. 「이런 거 소용읍다」하면서 니가 쾅쾅 안 찍어 넘겼나?
바우-내가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그놈들이 시키니까 할수없이….
산네-이래 될 줄 몰랐더나? 왜놈 앞잽이 권세가 평생 갈 줄 알았나?
바우-(쓸쓸히) 이제 다시 세워야제. 죽기 전에 다시 세워야 하는 기라….
산네-날샜다. 그 시퍼렇던 황진사네 세도도 니 도끼날에 작살 나뿌린 기라.
바우-(말없이 남근상 앞으로 다가선다)
산네-(막아서며) 안 된다! 내 땅이다! 어림 반푼 없다!
바우-(발끈해서) 이년아, 니도 죽으면 한 줌 흙이여! 이산, 죽을 때 머리에 이고 갈 거여, 사타구니에 끼고 갈 거여? 자식새끼 낳아서 젖이라도 한번 물러 보고 싶거든 심보를 고쳐라, 이년아!
산네-이고 가든 끼고 가든 니가 걱정할 거 읍다. 주제넘은 걱정 말고 저 흉측시러운 거나 뽀개 없애라!
바우-이년아, 구천에 가서 니 애비 잡고 물어봐라. 이거 다시 세울 때, 땅 주기로 했는가, 안 했는가!
산네-답답하면 니가 댕겨 오이라!
바우-(다시 주저앉으며 담배를 꺼내 문다)이년아, 니도 옛날 생각 좀 해 보거라. 니년 옘병 걸려 다 뒈져 갈 때, 병원에 데려다가 땀 빼게 해준 게 누고? 이년아, 내가 니더러 치마 끈을 풀라 한들 이렇게 모지락스럽게 거절은 못한다.
산네-(뱅글거리며) 치마끈은 풀어도 저거는 못 세운다!

<바우, 쓰디쓴 표정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땅꾼의 구성진 노래 소리 멀리서 들려온다>
산네-(산 아래를 흘겨보며) 저놈의 독사 대가리!….
바우-(이윽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인기라…….
산네-지꺼 지묵지, 남의 꺼는 와 넘겨다 보 노. 저놈의 뱃구레는 이산 다 삼키고도 남는 기라!
바우-(물끄러미 산네를 올려보다가)니도 산 때문에 서방 지니고 살기는 글렀다.
산네- (바우 옆에 앉으며) 남이사!
바우-이것아, 산도 가꾸어야 산 꼬라지가 나제. 이렇게 묵혀 두면 뭐가 될끼고? 옛날에는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우박 떨어지는 소리 같앴다.
산네- (입을 씰룩이며) 다 우리 아배가 거두었다. 니는 서울 살면서 바리바리 실어 가기만 했다!
바우-그래서 느거 아배한테 헐값으로 넘긴 거 아니가?(잠시 후) 그거는 그렇고, 산네야, 내가 중신할까?
산네-귀신 낮밥 먹은 소리하고 있네.
바우-저 땅꾼 말이다. 암만 해도 니한테 마음이 있는 갑더라.
산네(내뱉듯)-사나아 씨가 말랐나?
바우-와, 그 사람이 어때서?
산네-(외면하며) 좋으면 니 해라.
바우-(흘겨보다가) 여자는 혼자 살면 병난다. 씨 받을 때 씨 받고 열매 맺을 때 열매 맺어야제.
산네-(쓸쓸한 표정으로 먼 산을 본다)
바우-(독백으로)씨를 받아도 아주 잘 받아야제. 인간대사는 자식농사인기라.
산네-(발끈해서) 심보를 고치거라. 니 한테는 인간대사고, 나는 도둑놈의 씨를 받으란 말이가?(삿대질하며)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노? 무슨 원수가 져서 가만있는 년 두번이나 도둑놈한테 시집보낼라카노?
바우-저 사람은 안 그럴끼다.
산네-눈은 가죽이 모자라 찢어 놓은 줄 아나?

<산네, 발딱 일어서는데, 노랫가락소리를 끌며 땅꾼 등장한다. 농구화에다 작업복 차림. 허리엔 뱀 바구니를 차고 손엔 갈고랑이를 들고 있다. 그를 힐끗 쳐다본 산네, 본능적으로 외면한다>
땅꾼-(산네를 흘끔흘끔 살피며) 하이고오, 영감님. 구멍 파는 게 비암 뿐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요기도 대짜가 하나 있었뿌렀네요 잉. (남근상을 슬슬 쓰다듬으며)이놈이 몇번 들락거렸다 하면 천에 없는 방공호 구멍도 당장에 거덜나 뿌리겠네요 잉. 하여간 영감님도 주책이셔. 아랫동네 과부들 몸살나면 워쩌자고 요로코롬 요사스런 물건을 다 만든다요 잉?
바우-(못마땅한 눈길로 땅꾼을 바라본다)
땅꾼-(계속해서) 제발 참으시요 잉. 요새는 살모사도 흔찮으니깐드로 이놈의 땅꾼도 용빼는 재주 없당께.
바우-(신경질적으로)손모가지 불러들여!
땅꾼-(깜짝 놀라며) 워따매, 부정탈 인간이 따로 있제, 내 손이 워때서? (슬며시 물러서며) 아, 이 손이 어떤 손인디? 히마리 없이 축 처진 하초 탱탱 올라붙게 하는 손이여. 괜히 혼자만 정한 체 하지 마시더라고요 잉.
바우-아, 뱀 고아 처먹은 놈은 양기가 입으로 올라가나? 더운배 한번 못맞춰 보고 뒈지기 싫거든 냉큼 없어져!
땅꾼-(바우에게 다가서며)하이고오, 영감씨. 홀애비 사정 홀애비가 아는 법인디 요로코롬 퇴박만 주시기여? 아, 비암 아니라 산삼을 캐어 먹었음 뭐 한다요? 아, 도끼가 있어야 도끼자루를 해 박을 것 아니여? (산네를 힐끔 쳐다보며) 사십년 동안 다듬고 다듬은 방망이 갈데없이 화목되게 생겼어라오?
바우-정말로 확 잡아 뽑아서 육회 쳐 먹기 전에 냉큼 없어지란 말이여!
땅꾼-그거사 내가 할 소리제? 영감이나 싸게싸게 내려가 보시더라고. 올라올 때 보니깐드로….
바우-(바싹 긴장한다)
땅꾼-(산네 옆에 가 앉으며) 손주님 병세가 아주 우중하신 모양입디다? 아짐씨 입술이 포루족족해 갖고서는…….
바우-(다가서며) 뭐어야?
땅꾼-워따매, 나헌티 왜 이래샀소? 정 궁금하시면 직접 내러가 보실거지.
바우-(발을 구르며) 아, 그래서?
땅꾼-(씩 웃으며) 별것 아니여. 답답해서 바람도 쏘일 경 영감씨한테 데러오는 길이람서……. 내려가 보셔. 지금쯤 산막에 와서 쉬고 있을테니깐드로.
바우-(노러보며) 벼락 마중을 갈 놈. 왜, 나때매 뭐 잘 안되는 일 있어?
땅꾼-(눈을 크게 뜨며)별 귀신낮밥 먹은 소리 다 듣는 구만이라오? 아, 땅꾼이 비암이나 잡으면 됐지, 이 산중에서 일은 무슨 일?
바우-그럼 가서 구덩이나 훑어. 이빨 뽑힐 거짓뿌렁이 하고 다니지 말고.
땅꾼-허 참. 싱거운 동네 구장할 사람 다 보겄네. 남이야 비암 구멍을 훑든 여자 가랑이 사이를 더듬든 영감이 무슨 상관이당가?
산네-(땅꾼을 힐끗 쳐다보며) 혀가 만발이나 빠질 놈…….
땅꾼-(움찔한다. 그러나 못 들은 체하며 바우에게) 그라지 말고 이리 오셔. 내, 영감씨 드릴라고 요로코롬……. (뱀 상자 속에서 술병과 종이컵을 꺼낸다) 산 놈은 손주님 고아드리고 우리는 사주나 한잔씩 하더라고요 잉. (엉거주춤 다가서며 바우의 손을 잡아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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