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말투까지 지침 내리던 본사, 사태 터지자 “그냥 팔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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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어느 폴크스바겐 영업사원의 2년
어렸을 때부터 꿈의 차는 ‘비틀’
수입차 1위 폴크스바겐 자랑스러워
“정직한 독일차” 월 20대까지 팔기도
작년 9월 배출가스 조작 터져도
“문제없다” 해명 없이 할인 지침만
사표 내고 중고차 딜러…“맘 편해”

이 기사는 폴크스바겐 전직 영업사원 이모(33)씨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씨의 시점에서 작성했습니다.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한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 리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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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자동차가 좋았다. 아니, 콕 집어 폴크스바겐이 좋았다. 귀엽고 앙증맞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비틀이 언젠가 꼭 사고 싶은 ‘드림카’였다. 군대도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차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면서 차가 ‘남자의 장난감’이란 말을 실감했다. 200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맥주 회사,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어찌 보면 자동차 딜러가 되기 위한 ‘스펙’ 쌓기였다.

2013년 봄, 드디어 인천의 한 폴크스바겐 지점에 딜러로 입사했다. 입사 첫해 폴크스바겐은 메르세데스-벤츠·BMW를 누르고 ‘수입차 1위’에 올랐다. 주위에선 “탄탄한 독일 수입차 업체에 다닌다”고 치켜세웠다. 친구들은 “한 번만 시승시켜 달라”고 난리였다. 옷깃에 달린 회사 배지가 자랑스러웠다.

티구안·골프 같은 베스트셀러를 파는 건 맥주·휴대전화 영업보다 쉬운 점도 있었다. 특히 영업점에 들른 방문객은 낚시에 걸린 물고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번 보러 왔다”는 손님보다 “마음을 정하고 왔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긴 설명도 필요 없었다.

“정직한 독일 차입니다. 잘 달리고, 돌고, 멈춥니다.”

할인 프로모션은 부차적이었다. 이미 고객은 계약서를 쓰고 있었다. 한 달에 많게는 20대까지 팔았다. 내가 좋아하는 차를 원하는 주인에게 건네면서 돈도 벌 수 있어 행복했다. “차가 참 잘 나간다. 고맙다”는 고객 얘기를 들을 땐 자동차 딜러란 직업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판매왕’도 꿈꿨다.

2년 동안 잘 굴러가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지난해 9월. ‘폴크스바겐이 미국에서 배출가스를 조작했다가 걸렸다’는 뉴스가 나오면서다. 처음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선 괜찮겠지 싶었다. 하지만 고객들은 빠르게 돌아섰다. 폴크스바겐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계약서 사인을 코앞에 두고 연락을 끊는 고객이 나오기 시작했다. 차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보다 “샀다가 나중에 하자 생기는 것 아니냐” “중고차 값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해명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회사에서 알고 있는데 속여 파는 것 아니냐”는 전화까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제일 답답한 건 본사였다. 평소 딜러의 옷 매무새와 말투는 물론 세세한 판매 지침까지 교육시키던 본사가 사태가 터지자 묵묵부답이었다. ‘고객 문의엔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고 수차례 문의했지만 명확한 지침이 없었다. “차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평소처럼 팔면 된다. 다 지나간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고객에게 “저도 잘 모릅니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침만 꿀꺽 삼키는 날이 늘어 갔다. 본사에선 설명 대신 할인·무이자 판매 지침을 내려보냈다. 나의 판매 문구도 바뀌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은 독일 차입니다.”

하루 종일 “문제없다”는 말만 반복하다 보니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술만 늘었다. 술자리에서 “우리 브랜드는 거짓말하면서까지 차 팔 생각은 못했다”며 비아냥거리는 다른 수입차 딜러의 멱살을 잡은 적도 있다. 취한 채 “그게 내 잘못이냐”고 소리친 것만 기억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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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아우디A6·골프·티구안 등 중고차 값 하락 피할 수 없어
③ “독일서 만들고 한국은 팔았을 뿐”…배출가스 조작, 본사 겨누는 검찰



지인들조차 “진짜냐. 믿고 사도 되는 거냐”고 묻는 통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입사할 때 세웠던 원칙 -내가 사고 싶은 차를 남에게 팔자-마저 흔들리자 마음을 굳혔다. 비틀은 더 이상 드림카가 될 수 없었다. 올해 3월 사표를 냈다.

이후로 중고차 딜러로 일하고 있다. 번듯한 지점을 떠나 우중충한 중고차 매매 단지로 출퇴근한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편하다. 더는 폴크스바겐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철렁일 일도 없다. 종종 폴크스바겐 중고차가 매물로 들어올 때마다 옛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되살아나곤 한다. 나는 여전히 차를 판다. 하지만 이젠 좋은 차를 팔고 싶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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