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국무위 출범 뒤에도 국방위 유지…김정은, 군부 불만 의식한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북한 노동신문 보도에 등장하는 최고지도자 김정은(32)의 공식 직책은 3개입니다. 조선노동당 위원장과 국무위원회 위원장, 군 최고사령관을 열거한 뒤 그의 이름이 붙는 식인데요. 조선중앙TV 아나운서는 긴 직책을 잘못부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과거 김일성 추모 보도 때 김정일과 이름을 혼돈해 영영 해당 아나운서가 TV화면에서 사라진 ‘사고 사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국방위를 국무위로’ 개헌 해놓고
오극렬 등 국방위 부위원장 임명
‘김일성이 만든 기구’ 상징성 커
명칭 아예 없애기엔 부담 느낀 듯

세 직책 중에 당 위원장은 5월 초 노동당 7차 대회를 통해,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각각 앉았는데요. 김정은으로서는 ‘당 제1비서’와 ‘국방위 제1위원장’이란 명칭이 내키지 않았던듯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절대권력자의 자리와 명칭이 필요했던 그가 ‘제1’이란 단서를 뗀 새 직책을 거머쥔 겁니다.

기사 이미지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국무위원장이란 직책은 낯설어보입니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우리 정부 최고 정책 심의기관인 국무회의가 떠오르기도하는데요. 일각에서는 북한 국무위원장 상대는 우리 국무총리가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까지 나옵니다. 명칭에서나마 김정은이 ‘정상 국가화’를 겨냥해 ‘국가’라는 표현을 자주쓰는 것이란 풀이도 있죠.

북한은 이번 개정 헌법에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고친다’고 명시한 뒤 국무위원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자”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두고 국방위가 폐지되고 국무위가 그 권한을 넘겨받은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인데요. 김정은이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 노선인 선군(先軍)정치를 탈피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했다는 관측도 대두했습니다.

하지만 국방위원회가 간판을 내리지않았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징후가 파악돼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평양 권력 사정에 밝은 대북 소식통은 “국무위 출범에도 불구하고 국방위 조직·인력이 유지되고 있다. 폐지됐다는 건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은이 국무위원장에 추대된 직후 국방위 직책 관련 새 임명장을 기존 국방위 부위원장과 위원에게 수여하는 행사를 치렀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김정은의 친필 사인도 포함됐다고 하는데요. 군부 원로인 이용무(91)·오극렬(85)도 임명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들 두 사람이 국무위 체제에 맞춰 박봉주 총리와 최용해 정무국 부위원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퇴진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보니 북한이 국방위 폐지를 밝힌 적은 없습니다. 헌법 조문을 수정하며 ‘국방위를 국무위로 고친다’고 한 대목을 과잉해석해 국방위가 문을 닫은 걸로 단정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방위는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한 1998년 이후 ‘국가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으로 자리하며 절대권력의 정점에 섰는데요. 2000년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은 노동당 비서로 통칭되던 김정일 직책을 ‘국방위원장’으로 써달라고 우리 측에 요청할 정도였죠. 김정은 체제 들어서도 승승장구했는데요. 2014년 2월 박근혜 정부의 첫 남북 고위급 접촉도 청와대 안보실과 북한 국방위 간의 비공개 채널을 통해 성사됐습니다. 이후 국방위는 정책국 담화 등을 통해 대남 입장표명의 창구가 됐고, 미국에 대한 대응까지 맡아 보폭을 넓혀왔죠.

물론 국방위가 예전처럼 위세를 떨치기는 쉽지 않아보입니다. 무게 중심이 국무위로 옮겨간 게 분명하고, 김정은의 관심도 식었다는 점에서죠. 그렇지만 문패를 아예 떼버리기에는 김정은의 부담이 클겁니다. 할아버지 김일성이 1972년 만들어 44년의 명맥을 이어온 기구란 점에서입니다. 무엇보다 권력 핵심 축의 하나인 군부에게는 국방위가 갖는 상징성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더 보기
① 측근보다 핏줄…김정은, 여정·정철과 정기 ‘통치 모임’
② 김정은 상륙함·핵탄두 기밀 노출…우리 군 ‘뜻밖의 소득’
③ 20년 전 “어이 준장” 남측 대표 놀린 대남 강경파 김영철



국방위 존치는 이런 측면을 고려한 김정은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대북 소식통은 “군부 원로들의 불만을 의식해 국방위를 없애지 못한 것”이라고 평양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는데요. 지난해 5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때는 군 고위층에서 “무력부장이 어떤 자리인데 저리 함부로 끌어다 죽이는가”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집권 5년차를 맞은 김정은은 핵·미사일 도발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권력기반 다지기에 골몰하고 있는데요. 술렁이는 군부의 분위기를 그가 어떻게 다잡아 나갈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