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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절벽, 온라인 강좌 ‘무크’열풍 … 바뀌지 않으면 명문대도 문 닫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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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호 4 면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클래스 HBX의 수업 장면. HBX 주임교수인 바랏 아난드 박사가 수십 개의 화면에 실시간으로 접속한 전 세계 학생과 대화하고 있다. [AP=뉴시스]

고려대 1학년 K군의 대학생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는 전공선택 ‘과학기술의 역사’ 수업 시간이다. K군의 수업은 강의실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서울 잠실의 집에서 안암동 대학캠퍼스로 가는 전철 안이 1차 강의실이다. K군은 배낭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인터넷 동영상으로 과학기술의 역사 강의를 듣는다. 강의에 나오는 사람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과학기술사를 전공하는 제임스 퓨처 교수다. 30분 강의가 끝나갈 즈음 퓨처 교수가 제시한 5개의 토의주제 중 하나를 골랐다. 모니터 구석에 같은 주제를 선택한 수강생 이름과 토론 세미나실 번호가 떴다. 토론을 위한 간단한 파워포인트 발표자료를 만들어 세미나실로 뛰어갔다. 세미나실에는 수강생들과 담당 튜터 수전 사이언스(42) 교수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C글로벌영화기획사 대표 무비 박(38) 겸임교수가 홀로그램으로 함께했다. 세 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 세미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진행됐다.


영화 같은 상상이 아니다. 고려대의 계획대로라면 불과 2년 뒤인 2018년에 벌어질 ‘손에 잡히는 미래’다.


고려대가 2년 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면, 포스텍(포항공대)은 이미 미래 속에 살기 시작했다. 이 대학 산업경영공학과 4학년 이유빈씨는 지난 1학기 미국 사립명문 존스홉킨스대의 웹 개발 수업(HTML, CSS and Javascript for Web Developer)을 세계 최대 무크 플랫폼인 코세라(www.coursera.org)를 통해 들었다. 동영상 강의라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강의 도중 숙제와 쪽지시험은 물론이고 기말고사까지 인터넷으로 진행됐다. 포스텍은 이 수업에 1학점을 인정했다. 한 과목을 듣는 데 75달러가 들었지만, 포스텍에서 3만원을 지원해줬다.


포스텍 학생들에게는 올해부터 강의실에 국경(國境)이 사라졌다. 외국의 대규모 공개 온라인 강좌 무크(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가 정식 학점으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 중 무크를 학점으로 인정하는 곳은 포스텍이 유일하다. 또 학생이 동영상 수업을 미리 듣고, 실제 강의실에서는 의문점을 질문하고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역(逆)진행식 ‘거꾸로 교실’도 시작했다.

‘학생 절벽’과 ‘글로벌 경쟁’이라는 안팎의 위기 속에서 국내 명문대학들도 생존을 위한 개혁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학생 절벽’이란 저출산 여파로 대학에 들어갈 고교 졸업생 수가 해마다 크게 줄고 있는 것을 뜻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59만4229명인 고교 졸업자 수는 4년 뒤인 2020년에는 현재의 대입정원(53만 명)보다 2만 명 이상 적은 47만1591명으로 떨어진다. 2040년 이후엔 고교 졸업생이 40만 명 아래 ‘절벽’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대로 간다면 조만간 입학생이 없어 문을 닫을 대학이 줄을 이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상위권 명문대학들도 고교 졸업자 수 급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교 졸업자 수가 줄어들어도 입학생을 채우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교육 당국은 조만간 명문대에도 학생 정원을 줄여줄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상위권 대학의 더 큰 고민은 대학이 글로벌 경쟁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무크 열풍이다. 무크는 2011년 여름 미국 스탠퍼드대가 인기 있는 컴퓨터공학 수업 3개를 인터넷 기반으로 전 세계에 무료로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스탠퍼드대는 애초 많아야 수천 명 정도의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수업이 공개되자마자 등록 학생 수가 16만 명에 달했다. 무크의 사업성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컴퓨터 공학 강의로 대박을 터뜨린 스탠퍼드대 서배스천 스런(컴퓨터공학과) 교수가 곧바로 최초의 무크 회사 유다시티(Udacity)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같은 대학 앤드루 응 교수와 동료가 코세라(Coursera)를, 하버드대와 MIT가 각각 3000만 달러씩 투자해 에덱스(edX)를 만들었다. 7월 현재 코세라에만 세계 145개 대학과 기업들이 참여해 2000개에 가까운 강의를 운영하고 있다. 무크 강의는 무료로 들을 수 있지만, 수료증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문제는 무크 프로그램이 대부분 세계 100위권 안팎의 글로벌 명문대학 강의 위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서울대가 에덱스에, KAIST와 연세대가 코세라에 참여하고 있는 게 전부다. 세계 대학사회에 극심한 양극화가 예상되는 이유다. 유다시티의 창업자 스런 교수는 정보기술(IT) 잡지 와이어드와 인터뷰에서 “향후 50년 이내에 전 세계에서 10개의 대학만이 대학교육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같은 위기감 속에 한국에서는 사립대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달 13일 경희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숙명여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국외대·한양대 등 서울의 10개 주요 사립대 총장들이 모여 발족한 ‘미래대학포럼’이 대표적이다.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고 21세기 국제 경쟁력을 강화해 한 차원 높은 성장을 함께 도모하자’는 점잖은 구호가 이날 내세운 공식 취지였지만, 속마음은 심각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고려대 마동훈 미래전략실장(미디어학부 교수)은 “모든 것을 바꾸는 혁신이 없으면 한국 대학들은 모두 도태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인식하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들 대학 중 최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이 고려대다. 이 대학은 지난 4월 신문지상에 전면광고로 11개 항목으로 된 대학의 미래 계획을 발표했다. 11개 항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2년 뒤인 2018년부터 출범한다는 ‘미래대학’이다. 새로운 개념의 이 단과대에서는 전공이 따로 없다. 대신 인문학과 사회과학, 디자인적 사고, 인공지능, 데이터과학 등을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방법으로 폭넓게 공부한다. 교내 창업센터 파이빌, 출석부·상대평가·시험감독이 없는 소위 ‘3무(無) 정책’, 교수와 학생 스스로 맞춤형 학기를 설계하는 ‘유연학기제’ 등도 있다. 고려대는 이를 위해 지난 5월 말 30여 명의 교수로 구성된 ‘미래대학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물론 벌써 장애물이 만만치 않다. 미래대학에 정원을 빼앗기는 기존 단과대학 교수들의 반발이 거세다. 교육부에서 대학의 학생 총원을 묶어놓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학과나 단과대를 세우려면 기존 학과의 정원을 가져와야 한다.

연세대는 고려대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지난해 이미 제3의 창학을 위한 캠퍼스 인프라 선진화 작업을 끝내고, 올해부터는 내실을 다진다는 입장이다. 2013년 문을 연 미래융합연구원에는 인문·사회·자연 분야를 망라하는 50개의 연구센터가 가동 중이다. 대표적 글로벌 무크인 코세라에서는 이미 15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화여대는 올해부터 학생 스스로 전공을 조합해 설계하는 ‘자기설계전공’과 한 학기를 쉬면서 사회 경험을 하는 ‘도전학기제’를 도입하는 등학제 유연화를 시도하고 있다. <표 참조>


한국형 무크(K-MOOC)도 닻을 올렸다. 지난해 시범사업을 시작한 교육부는 올해 K무크 강좌를 100개로, 내년엔 300개까지 늘린다는 방침이다.


포스텍 김상욱(생명과학과) 교수는 “무크의 등장으로 국내 대학교수들이 해외 대학교수들과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며 “교수도 대학도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남건우·이우연 인턴기자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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