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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외교 제1인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경북 고령으로 신유한공의 고향을 찾아갔다. 대구에서 버스로채 1시간도 안 걸린다. 고령군개진면양전1동 고령에서 동남3km지점.
지금 거기에 신공의 흔적는 없다. 자손들도 살지않는다. 신공이 살았던 집터엔 고목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으나 당시의 나무도 아니다. 그의 위패를 모셨던 사당은 허물어져 밭으로 일구어졌고 다른 민가들이 들어섰다.
이 동네에 사는 주용찬씨 (교세)가 반가이 맞아준다. 그는 향토사학자다. 신공을 잘 알고 있었다. 『당대 외교의 제1인자요 우리마을의 어른이었다』면서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 신공집안과 조씨집안은 항상 의좋은 이웃간이었다.
『신공은 영해신씨지요. 죽 이 동네에 살다가 지금 8대손이 덕곡면에 살고 있어요. 5대손 성암 신상운공도 이름을 남긴 대학자지요』
서씨는 자신이 소중히 간직한『성암집』 한권을 내놓으며 말을 잇는다.
『대밭속의 샘으로 푸른학이 날아드는 태몽을 꾸고 신공이 태어났지요. 그래서 그의 호가 청천이예요. 지금 신공의 묘는 주낭산 맨꼭대기에 있어요. 쌍림면 합가동과 합천군계의 주봉으로 이일대에선 가장 높은 곳이죠. 왜 그런데 모셨느냐 하면 신공이 생전에 재기가 뛰어나고 꿈이 컸으나 시기를 받아 그 뜻을 펴지 못했으니 사후에라도 높은곳에 장사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해요.』
고령북방 8km지점. 덕곡면 원송동으로 8대손 신병열씨 (49)를 만나러 갔다. 저멀리 가야산의 설봉이 보이는 마을.
부인 김추자씨 (45세)와 2남3녀를 두고 있다. 이웃에 누님 신병주씨 (51세)가 살고있었다.
집은 허름했으나 계암의 사후 그 문도들이 지어준 집이라했다.
『먹고 살기가 바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어른들은 일찍 돌아가시고 선조들에 관심 가질틈이 없었지요. 이제 그나마 터를 잡았으니 자식들에게도 훌륭하신 조상어른들의 얘기를 들려줘야겠어요』
신씨는 조선통신사와 신공의 얘기를 기획연재해준 중앙일보사에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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