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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로 380km 10여일만에 종단|서울∼부산 총신사의 길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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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조선통신사가 한성 (서울)을 출발, 부산을 거쳐 일본의 에도 (강호)까지 다녀오는데는 대략 8∼12개월이 걸렸다.
신유한공이 제술관이 되어 다녀온 제9차 조선통신사 때도 1719년4월11일 (음력) 한성을 떠나 이듬해 1월24일에 돌아왔으니 9개월이상 걸린 셈이다. 수륙1만여이의 험난한 여로였다.

<노폭 5∼10m의 길 판관등도 나와 전송>
4월11일, 신공 일행은 부산을 향해 영남로를 밟았다. 영남로는 서울-부산간의 3백80km 코스. 신라의 한반도 통일후 생기기 시작, 여말·선초 대왜전략을 계기로 확정됐다. 노폭은 5∼10m로해발 6백38m의 새재를 제외하면 그리 험준한 길은 아니다.
지금은 거의 황폐한 길. 통신사 일행 4백75명은 국서를 받들고 임금이 내어준 절월 (절월) 을 받아 숭례문 (남대문)을 빠져나왔다.
『도성의 문을 나서려는데 정강권상일 ,판관 김익겸은 같은 영남 사람이라 술을 받아와서 작별한다. 좌랑 김리만, 직강 강필경, 시직 홍중성은 각각 시를 지어 이별의 뜻을 보냈으며 진사이주진은 약주머니에 약품을 넣어가리고 와서 선물했다. 최사집은 길가에 술자리를 벌여 이별을 아껴주니 그 정성어린 것이 마치 골육과도 같다』 (신공의『해유녹』)
이날 양재에서 자고 다음날 판교에 닿았다. 광주부윤 윤양내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객관으로 나와 대접했다.
당시 숙박시설로는 원과 명관. 역관이 있었다.

<침략·우호 엇갈린 역사의 길목 새재>
원은 7세기 이전부터 이미 생겨났다. 고려시대 각 절들이 운영하면서 크게 번성했으나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국유화됐다. 임진왜란중 대부분 파괴된후 주막의시대를 열었다.
객관과 역관은 관리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객관은 규모가 크고시설이 훌륭해 고관과 외국사신들이 주로 이용했다. 역관은 객관과 함께 선초엔 고관들이 용했으나 점차 퇴락, 조선조후기엔 주로 하급관리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격이 떨어졌다.
판교는 사신 왕래시 반드시 경유해야하는 서울의 관문. 수백명의 통신사일행과 사신들을 위한 접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신공은 용인을 거쳐 죽산·충주를 기나 16일 온천지 수안보 (수안보)에 도착했다.
새재의 문턱에 위치한 안보는 서울과 대구의 중간지점으로 대읍 충주와는 지척간. 서울을 출발한 여행자들은 새재를 앞에두고 이곳에 새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며 영남에서 오는 사람들 또한 새재를 넘은 고단함을 이곳에서 풀었다.
다음날 신공일행은 비를 맞아가며 새재 (조령)에 올랐다.
『고갯길은 진창이 돼서 말발굽이 푹푹 빠져 매우 힘들다. 고개마루에 초막 한채가 있다. 여기가 일행이 말을 바꾸어 타는곳이다』(『해유녹』)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영남노상에서 가장 큰 원이었던 조령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15∼20간 정도의 숙박시설이었으나 1913년 일본인들이 파괴, 지금은 돌담만 남아있다.
새재는 본래 천검의 요새, 단애의 난소였다. 그러나 임란당시까지 이런 지형을 이용한 어떤 방어시설도 없었다. 임란의 전투에선 이 요새를 싸움도 하지않고 내준채 충주 탄금모방어선이 무너짐으로써 전략상 큰 차질을 빚기도 했다. 임란후 주흘관·조곡관·조령관등 세개의 관문을 설치했다. 아뭏든 새재는 한일간에 수많은 인물과 문물이 오가고 「침략」과「선린우호」가 교차했던 역사의 길목.

<선린의 언덕 영가대 흔적도 찾을길 없어>
새재를 빠져나간 신공일행은 문경·유곡을 거쳐 용궁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공은 일행과 헤어진다.
일행이 관례에 따라 경상좌도의 여러읍을 두루 돌고 10여일만에 부산에 닿는동안 신공은 고향인 고령에 들르기로 한 것이다.
함창에서 점심을 먹고 상주에서 1박. 상주객관은 영남로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본채안에 여러개의 온돌방과 마루방·부엌·누각·정자·목욕실등을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개령과 성주를 거쳐 21일 고령의집에 도착했다. 『5월7일. 아침에 비가 내렸으나 느지막에는 갰다. 나는 마침내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띄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을 타고 나섰다. 어린아이는 사정도 모르고 나를 따라 나오며 운다. 무슨말로 달래야 할지 몹시 난처하다』 (『해유녹』)
신공은 영산과 밀양·양산을 거쳐 5월13일, 서울을 떠난지 32일만에 부산에 닿았다. 여기서 다시 1개월여를 머물며 먼 여로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뒤 6월20일 드디어 배를 탔다.
배를 탄곳은 부산의 영가대. 자성대자락에 위치했다. 역대 통신사들이 일본을 향해 배를 띄웠던 선린의 언덕. 통신사 일행은 떠날 때마다 이곳에서 장엄한 해신제를 올렸다.
그러나 지금 영가모의 흔적은 찾을길 없다. 영가대기슭의 정박장은 1906년까지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경부선철도부설로 회생됐다. 해안은 매립돼 지금 해안선은 자성대로부터 1km정도 떨어져나갔다. 영가대는 일제때 허물어졌다. 그 일대엔 시장과 학교·공장들이 둘어섰다. 이 터가 영가대임을 알리던 철로변의 돌비석마저 지금은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버렸다.
글 이근성기자
사진 조강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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