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0)-제84화 올림픽반세기 -김성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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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7개 종목에 걸쳐 경기가 시작됐다. 미국은 육상과 수영, 소련은 체조와 레슬링에서 단연 우세를 보이며 치열한 득점경쟁을 벌였다.
한국선수단은 초반 육상·레슬링·사이클 등에서 부진을 거듭했다. 임원들은 『국민들을 볼 낯이 없게 됐다』며 침통해 했다.
특히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우리의 마라톤은 베를린올림픽, 51회 보스턴마라톤(47년)을 제패한데 이어 50년 4월엔 54회 보스턴마라톤에서 함기용·송길윤·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쓰는 등 화려한 전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대회엔 런던올림픽에서 우승을 눈앞에 두고 좌초됐던 최윤칠과 25위에 머물렀던 홍종오가 설욕을 노려 재도전했고 신예 최충식(당시 22세·연희대)도 패기만만했다.
80여명의 건각들이 출전한 마라톤은 초반부터 체코의 「인간 기관차」「자토펙」과 영국의 희망 「짐·피터즈」의 대결이었다. 「자토펙」은 이미 육상 5천m와 l만m에서 금메달을 따놓고 있었다.
최윤칠은 평소기록보다 약간 여유 있게 2진그룹을 형성하며 역주했다. 35km 지점을 5위로 통과한 최윤칠은 골인지점 1백m 남기고 앞선 주자를 따라잡아 4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2시간26분36초, 3위보다 29초 늦고 5위와는 5초, 6위와는 6초 차이의 대접전이었다. 6위까지의 기록이 모두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최윤칠은 골인한 뒤에도 자신이 3위로 알고있었다. 35km지점을 지날 때 응원 나온 주상점선수(권투)가 독려하기 위해 일부러 4위라고 알려줬기 때문에 1명을 따라잡아 3위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최윤칠의 올림픽 도전은 잇단 불운으로 막을 내렸다. 『학교수업(연희대)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훈련을 제대로 못했고 전쟁중이라 세끼 먹기가 힘든 때여서 영양상태가 몹시 나빴다.』 최윤칠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남은 역도와 복싱에 마지막 기대가 모아졌다. 역도경기가 열리기 전날 밤 선수단의 재무담당 임원 구봉조씨가 우리 방을 찾아와 『이렇게 깩 소리도 못하고 참패할 수 있느냐. 역도에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달라』고 하소연했다.
구씨는 부인이 짐 보따리에 넣어준 인삼 한 근을 역도선수들에게 내놓았다. 우리는 이 인삼을 밤새도록 고아 뿌리째 씹어먹고 원기를 북돋웠다.
역도 첫날엔 56kg급의 김해남이 4위에 입상, 순조로운 스타트를 보였다. 국제무대에 처녀 출전하여 거둔 성적으로는 기대이상이었다.
그러나 우리 선수단의 최고참노장 남주일(60kg급)은 컨디션이 나빠 자신의 기록에 크게 미달해 9위에 머물고 말았다.
둘쨋날엔 나와 김창희(67.5kg급)가 출전했다. 김창희는 런던올림픽에서 6위를 차지했던 유망주. 김창희는 26명의 강호들이 겨룬 가운데 자신의 최고기록을 5kg이나 초과해 4위에 입상, 기염을 토했다.
내 체급(미들급)에서는 출전선수 25명 중 런던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조지」(미국)가 단연 우세했고 나는 3위를 놓고 「라가브」(이집트)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내가 용상경기 마지막 시기를 남겼을 때 「라가브」는 3백82.5kg을 기록, 나는 1백47.5kg이상을 올려야 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 나는 긴장을 풀고 바를 잡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1백47.5kg을 번쩍 들어 올려 동점을 만들었다.
우리 선수단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계체량에서 이미 나는 「라가브」보다 2백g 적었기 때문에 동메달이 확정됐다.
헬싱키 하늘에 첫 태극기가 올랐다. 우리 선수단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내선수로 올림픽 2회 연속 메달획득의 기록은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또 두 번 연속 계체량으로 동메달을 따낸 기록도 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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