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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잡아두고 「토지」 끝내고 싶어|박경리여사 가을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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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원주의 거리는 내가 작가인 것을 잊게 한다. 고추 자루를 들고 방앗간에 가거나 난로를 설치하기 위해 함석집을 찾을 때, 장거리를 서성거릴 때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이 늙어가는 한 여자를 느낄 뿐이다.
관청이나 은행, 출입문이 번듯한 부자 상점, 몇 사람이 모여 구성되고 간판이 붙었다하면 어김없이 공과 사를 막론하고 관료의식에 찌들고 굳어진, 아름다운 청춘까지도 그렇게 굳어버리는 그런 곳에 가면 더더구나 위압감에 당황하고 겁먹는, 별수 없이 초라한 늙은 여자가 된다.
그런 나의 초라함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은 편리하고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쓰는 아무개를 알아보고 말없이 배를 깍아 대접하던 서점의 소녀, 따뜻한 마음씨를 잊지 않지만 그후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나를 아는 곳을 기피하는 심리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탓이겠고, 작가라는 의식의 구속을 받기 싫은 때문이겠으나 PR를 좀 하셔야지요, 하던 어느 농부의 말에서 상기되는 오늘의 현실이 나를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인기직업으로 간주되는 소세가…. 아뭏든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같이 늙어가는 여자, 그 풍경 속에서 얼마간 안주하면서 때론 생활을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서민의 쓰라림을 느낄 때도 많다. 내가 싫어하는 말중의 하나가 서민이다. 백성은 너무 낡았고 민중은 새로와 토착되지 못한 감은 있으나 그래도 대다수의 민초를 대접해 주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싫어하는 서민이라는 말을 굳이 쓰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힘을 가진 사람 이외 대다수가 바로 庶民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내가 작가인 것을 자각하기는 끝도 한도 없는 일을 혼자 하면서 끝도 한도 없는 생각을 할 때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 전부를 가둬 둔 공간이기도 하다.
자동차가 집 앞에 서있는 동안도 그렇다. 나를, 아니 작가아무개를 찾아오신 분들, 그 중에는 내게 짐을 지우려는 괴로운 대면도 있으나 대부분 격려해 주시고 아껴 주시던 오랜 지기들, 그분들 앞에서는 작가로서 스스럼이 없다. 그리고 우편물인데 편지와 책이 내 직업을 일깨워 준다. 독자의 편지를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미국의 작가 「포크너」처럼 용기도 자신도 없는 나는 수없이 회답이라는 숙제에 부닥쳐 괴로와해야 한다.
더우기 심혈을 기울인 저작은 그 소중한 분신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궁금해할 터인데, 십수년간 끈덕지게 준열하게 나는 나에게 편지 쓸 것을 명령하지만 엽서 한장 띄운 일이 없다. 전화번호도 번번이 메모하지 못하고 불편을 겪어야 했다. 쓴다는 행위에 대한 기피증, 그것은 『토지』라는 장황하게도 긴 소설을 쓰면서 얻은 병인것 같다. 근자에 온 편지 중에 꼭 회신을 하리라 버른 것이 두 통 있었다.
하나는 고 변영노선생님 기념행사의 발기인이 되라는 내용인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역시 고인이 되신 김말봉선생님 기념사업의 하나로 원고 청탁을 한 것이었으나 결국 회신을 하지 못했다. 두 분은 다같이 부모만큼이나 연령이 떨어진 대선배시지만 다소의 차는 있으나 내게 기억을 남겨두셨다. 대한공론사 사장이신 변선생님을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청탁 관계로 자택을 찾아 그 분을 뵌 일이 있었다. 중앙청 근처였던지 골목 구석의 아주 옹색한 작은 집이었다.
사모님은 나의 모교 진주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신 분이어서 비록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친근함을 느꼈고 가사의 고달픔이 역력해 보였다. 향기 높은 중국다를 대접받고 변선생님께서는 낡은 지프로 내 직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셨다. 그 분에 대한 기억은 그것뿐이지만 가끔 다를 선물로 받을때 그때 마셔 본 중국차 생각이 나곤 한다. 김말봉선생님과의 인연은 훨씬 깊다. 허름한 회색 두루마기, 그것도 고름이 아닌 단추로 여미신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어려운 문인들을 곧잘 도와주시던 분, 인사를 안한다 하여 면전에서 꾸짖던 솔직한 성품이었다.
한번은 원고를 받으려고 동자동 자택에 간 일이 있었다. 원고를 들고 선생님이 나오셨다. 그리고 설렁탕을 시켜 놓았으니 함께 점심을 하자 하셨다. 선생님은 지독하게 맛이 없는 설렁탕을 땀을 흘리며 잡수셨다.
섭섭했던 기억도 있다. 신문사를 그만 두고 처음 소설 연재를 시작하려 했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 연재를 하다니 건방지다면서 몹시 꾸짖으신 일이 있었다. 후진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로 받아들인 나는 좀 신랄하게 응수했던 것 같다. 이튿낱 선생님은 갈채다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과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야. 어젯밤 성질이 이래서 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 솔직하다기 보다 선생님의 얼굴은 너무나 천진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그 분은 내게 다시 화살을 날리셨다. 박경리씨는 장미꽃이다, 가시 돋친 장미꽃, 그 가시에 나도 한번 찔렸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만송족으로 지단이 극심했던 말년, 말년이라기보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참담했던 선생님 처지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4·19의 피 흘리는 학생들이 수없이 실려 들어오던 역전의 옛날 그 세브란스병원, 그 곳에 입원해 계시던 선생님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 분을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내가 잘못했다, 그놈들이 신문사 사장 자리 주겠다, 문교부장관 자리 주겠다하는 바람에, 그 말을 되풀이하셨다.
씁쓸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나는 추호도 감상적인 것으로 그 분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간 기억 속에 그 분만 유독 남아 있을 이유도 없다.
아마도 그 분을 때때로 생각하는 것은 40대의 한 남성이 그분 묘소에서 흘린 눈물 때문인성 싶다.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났을때 선생님 가족으로부터 묘비를 세우는데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묘소에서 정성껏 마련해온 음식도 먹곤 했는데 전부인 소생으로 알고 있는 40대에 접어든 아드님께서 문인 몇몇 분에게 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때 수없이 굴러 떨어지던 그분의 눈물은 오늘까지 내게 있어선 감동적이며 수수께끼다.
그런 상황 속에선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위축될 것이요, 경우에 따라 어머니를 원망할 수도 있으련만, 내 주변에서도 흔히보는 계모와 전처 소생간의 심한 갈등·증오, 결국 남남으로 갈라지고 마는데 저 뜨겁고 절절한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그것은 김말봉선생님 생애의 결산같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만일에 내가 선생님 위치에 있었다면 의리의 아들이 눈물을 흘려주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어쨌거나 원고가 이것으로 매듭지어진 것은 홀가분하지만 계속해서 체하고, 계속해서 등뼈를 문지르고 해서 지금 문지른 자리의 살갗이 따갑다. 날으듯 가는 세월, 매달리며 일(『토지』)을 끝내려 하는데 제발 나를 그냥 두어달라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어제도 그제도 계속해서 나를 선택하여 먼길을 오신 분들을 차 한잔도 없이 뜰에서 돌려 보내야하는 괴로움,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내 건강을 염려하며 문을 나서는 그분들, 부끄러워서 괴롭고 이 빚은 보다 완벽하게 『토지』를 끝내야 갚게 된다는 강박이 나를 절망하게 한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나는 내 실상보다 몇 갑절 평가되고 자신은보다 이기적으로 옹그라들고 이 틈바구니에서 달아나고 싶다. 과연 나는 옳게 살았고 옳게사는 것일까? 김말봉선생님의 삶의 결산, 그 뜨거운 눈물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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