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애걔” 싶었다. 삼성전자가 27일 발표한 인사제도 개편안 말이다. “조직 문화를 확 뜯어고치겠다”며 1년이나 공을 들였다. 10만 직원의 삼성전자에 스타트업 문화를 심겠다는 포부도 거창했다. 결론이 ‘반바지’와 ‘님’ 호칭이라니. 효율적인 회의나 빠른 보고, 불필요한 잔업 철폐 같은 항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이런 실망감은 기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젊은 삼성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냉소적 반응이 적지 않았다. “크게 바뀔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거나 “스타트업 문화로 바꾸겠다면서 사장들이 나와서 선서하는 자체가 삼성스러웠다”며 시큰둥했다. “이 정도 내용도 실천하긴 힘들 것”이란 부정적 전망도 나왔다.
허무한 마음에 한 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더 과감하게, 확 뜯어고치지 못합니까.” 한참 들은 해명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삼성이 한국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어떻게 더 바꿉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삼성만이 아니라 한국의 조직 문화가 수직적이다. 처음 만나면 나이를 묻고 서열을 정한다. 한 살이라도 위면 ‘형’이나 ‘언니’로서 조언을 시작한다. 말대꾸라도 하면 “인생 선배로 얘기하는데…”라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연공주의도 서열 문화의 산물이다. 사원으로 들어와 부장이 될 때까지 조금씩 연봉도 올라가고 목소리도 커진다. 성과를 못 내도, 몇 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그렇다. 그런 조직에선 모난 돌이 안 나온다. 윗사람 눈치 보며 버티다 보면 나도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된다. 왜 나서서 모험을 하겠는가.
이런 문화를 감안하면 개편안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과장·부장 직함이 다 없어진다. 20대 신입사원이 40대 부장급 직원을 “길동님”이라고 부른다. 길동님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치보기 식 야근 철폐’ ‘충분한 휴가 사용’ 등의 항목도 ‘말만 그렇지 실제로 되겠어’ 싶다. 그 임원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한국에선 이 정도만 실천해도 큰 변화다.
이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실망감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삼성의 전체 매출에서 국내 매출 비중은 10.4%에 불과했다. 세계 직원 32만 명 중 국내 직원은 3분의 1도 안 된다. 분명 한국 기업이지만 본질은 ‘글로벌’ 기업이다. 실망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속내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다른 대기업은 한국 문화의 굴레를 못 벗어나도 세계로 뛰는 삼성전자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삼성전자의 ‘길동님’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세계 무대에서 검증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다른 대기업과 한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삼성전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이번 개편안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는 이유다.
임 미 진
경제부문 기자